‘콜로세움’ 하면 대개 검투사를 떠올린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때문일 게다. 하지만 <벤허>나 <쿼바디스> 같은 옛날 영화를 본 이들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 순교자들을 떠올릴 것이다. 로마는 동방에서 온 이 괴상한 종교의 추종자들을 맹수에게 던져주었으나, AD 313년에 결국 이 종교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함으로써, 갈릴리 지방에서 발생한 유대교의 한 종파는 일약 세계 종교로 비약한다.
이 모두가 순교자 덕분이다. 예수 자신이 순교자였다. 베드로를 비롯해 그를 따르던 사도들도 대부분 순교했다. 사도들이 전파하고 다니던 복음을 들은 초기 기독교인들 역시 제 눈으로 보지 못한 채 유대 촌 동네의 어느 청년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종교의 올바름은 이렇게 머리 좋은 사람들에 의해 ‘논증’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에 의해 ‘증거’되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말대로 역사는 종종 두번 반복되나 보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유럽 대륙 전체가 교회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절에, 로마에서는 난데없이 또 한번 순교의 드라마가 벌어졌다. 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여러 무리의 종파들이 가톨릭 교회의 성물들을 파괴하며 교황이 사는 로마로 행진을 해왔다고 한다. 왜? <쿼바디스>에 나오는 베드로처럼 로마에서 순교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은 단호하게 말했다. “로마에서 그들은 소원을 성취할 것이다.”
첫 번째 순교가 비극이었다면, 두 번째 순교는 희극이었다. 죽지 못해 환장한 광신도들이 ‘나 죽여주소’ 하고 벌인 불필요한 난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순교’를 하고 싶었을까? 아마 종교적 ‘지루함’(ennui) 때문이었을 것이다. 종교의 진리가 가장 감동적으로 빛나는 곳은 순교의 현장. 하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사자 밥이 된 순교자도 그들과는 이미 천년의 세월을 격하고 있었다. 그 천년 전의 전설을 이들은 몸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목회자 다섯명이 선교를 하겠다고 이라크에 잠입했다가 되돌아왔단다. 그중 어떤 이는 아예 옷에 버젓이 태극기까지 달고 있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태극기는 조국의 상징일지 몰라도, 적어도 이라크에서 그것은 ‘내 목을 따주소’라는 문장과 진리치가 똑같다. 대단한 용기다. 다섯명 중에 세 사람은 “그렇게 위험한지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증세가 심한 두분은 “기꺼이 순교하겠다”고 하셨단다. 할렐루야….
이 두분이 기꺼이 하시겠다는 그 ‘순교’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했던 진짜 순교일까? 아니면 천년 뒤에 반복된, 죽지 못해 환장한 광신도들의 순교 놀이일까? 앞의 것은 물론 고귀한 신앙이다. 하지만 후자는 고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신앙도 아니고, 그냥 치료받아야 할 정신질환일 뿐이다. 순교가 없는 산문적인 시대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다시 종교극(宗敎劇)을 살고 싶은 분들. 그러다 죽어 하늘나라에 가도 하나님한테 ‘잘했다’고 칭찬 못 듣는다. 야단이나 먹지….
한국 기독교, 몸은 성장했을지 몰라도 정신은 아직 중세 말이다. 얼마 전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들고 부시를 위해 기도하던 광신도들 중 몇몇은, 이라크 전쟁을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성전으로 축성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 이라크가 무궁무진한 석유의 시장이라면, 한국의 기독교 광신도들에게 이라크는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한국을 대신할 새로운 신앙의 시장이다. 그래서 저렇게 공격적으로 선교에 나서는 것이다.
서울 어느 교회의 목사님은 김선일씨를 비난했다. 당당히 순교하지 않고, 목숨을 구걸했다는 것이다. 다른 분은 몰라도, 이분이 선교를 위해 이라크에 잠입하는 것은 말리고 싶지 않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무장세력에 잡혀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이 목사님의 입은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며, 그분을 증거하기에 바쁘리라고, 여러분, 믿∼슘미꺄?!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