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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들
장진(영화감독) 2004-11-19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분명히 나는 태어날 때부터 급하거나 안절부절못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느긋하고 여유있는 작태에 어른들이 놀라곤 했다.

엄마- 넌 태어나자마자도 주변을 확인하고 여기가 어딘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다 살핀 뒤에 울기 시작했다. 니가 다른 태아들보다 3분 정도 늦게 우는 바람에 우린 목청없는 아이를 낳은 줄 알고 기겁을 했었지….

자라면서도 그랬다. 학교의 등교시간이 내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3교시가 끝날 때쯤 들어가도 그다지 조바심나지 않았다. 1, 2교시에 배운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거야란 예측과 더불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잘 버티는 맷집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그랬다. 언제나 여유가 있었고 여백이 넘치는 생활이었다. 난 언제나 삶에 여유가 있었고…. 그것은 다른 인생들과 구별되는 아주 착하고도 영특한 습성이다. 그러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급해졌다. 식당에 가서 첫마디가 “뭐가 빨리 되요?”, 촬영장에 가서도 “대사 좀 빨리해라”, “필름 좀 빨리 돌려”, 집에 갈 때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있는데도 문닫힘 버튼을 계속 누르고 집 초인종을 누른 뒤에 아무도 “누구세요?”라는 말을 안 했는데 먼저 “나예요!!!”라고 소리지르고….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가 나오는데 손은 이미 종이컵을 감싸쥐고 고개 숙여 나오는 커피를 보고 있고, 운전할 때도 내 앞의 신호등은 안 보고 옆차선 신호등이 주황색이 되면 일단 출발하고, 군대에서 사격할 때도 타깃은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먼저 방아쇠 당기고, 야구도 초구에 방망이 돌리는 선수가 좋고 <스타크래프트>도 저글링 러시나 1마린 9SCV 러시가 짱이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가끔씩 나도 나에게 자문한다. ‘너 왜 그래? 너 왜 이렇게 급하게 세상을 사니? 너 왜 이리 조급해졌어? 너 안 그랬잖아? 도대체 무엇 때문이니? 말해봐? 왜 그래? 왜? 말해보라니까? 빨리 말해!! 묻고 있잖아 얼른 말해봐!!! 이거 참 답답하군… 어서 좀 말하라니까….’ 아∼ 난 정말 여유있는 사람이었다.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들었을까? 엄마 때문인가? 하긴 엄마는 날 깨울 때 언제나 “얼른 일어나”라는 말부터 시작하시지…. 군대에서 바뀌었을까? 하긴 선착순 돌 때… 일단은 빨리 와야 다시 뛰지 않으니…. 신호등도 문제야, 횡단보도 건널 때 여유있게 건너다가도 점점 깜박이며 촉박한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빨라지면 덩달아 급한 마음에 뛰게 되고…. 생각해보니 내 이름도 문제군. 누구나… “장진!” 하고 부를 때 장∼을 장음으로 소리내는 사람은 없지. 그래서 자∼앙∼진∼ 이렇게 발음을 안 해. 내 이름은 언제나 급하게 소리가 나와 “장진!” 지금 이 글 읽으면서도 다들 한번씩 소릴 내보는 거 알아. 거봐 짧게 나오지? 그렇게 “장진! 장진!” 자꾸 급하게 들으니 내 성격이 급해져. <씨네21> 남동철 편집장을 예로 들면… ‘남 동 철!’ 이 이름은 장음으로 소리나고 자연히 천천히 부르게 돼 있잖아. 누가 이 이름을 ‘남동철!’ 하고 단음으로 급하게 부르겠어? 한두 가지가 아니네. 나를 비롯해 우리 모두를 급하게 만드는 것들… 조급하게 만들고 그래서 작은 일에도 어쩔 줄 모르고 쉽게 당황하고 아등바등하게 만드는… 수많은 것들…. 우리 주변에서 늘 ‘시간이 없어요’라고 외치는 것들!! ‘그냥 오세요’라고 안 하고 항상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냥 ‘잘 자고 잘 일어나라’라고 말해도 될 것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라고 말하는 어른들, 기왕에 뽑은 대통령 뭘 하든 지켜보고 기다려보면 될 것을 마땅한 대안들도 없구만 뭐가 그리 조급한지 안 돼요, 왜 그래요, 거기서 그만, 이라고 종용하는 사람들…. 누군가 여유있고 느긋하면 오히려 ‘저 친구 참 속터지겠네’라고 핀잔을 주는 세상 분위기….

이런 것들이 없어지고 조금 늦으면 어때? 조금 천천히 가면 어때? 조금 기다려보는 것도 좋지. 오늘 안 되면 내일 하자고, 이런 기분들이 당연하고 상식적인 그런 세상이 된다면 나의 이 조급한 성격도 예전처럼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지금 쓰는 이 글도 그래. 오늘이 원고 마감이라고 자꾸 전화하면 어떻게 해? 그냥… ‘아, 아직 안 썼어요? 그럼 뭐 글 써질 때 써서 아무 때나 편할 때 주세요’라고 말해준다면… 그런 세상이 된다면… 참 괜찮을 것 같다 이거지 뭐….

장진/ 영화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