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안규철(미술가) 2004-11-12

문은 집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 중 하나다. 벽과 지붕이 있어도 문이 없다면 집이 될 수 없다. 안과 밖을 서로 통하게 하는 문이 없다면 집은 무덤과 같은 것이 될 것이고, 안과 밖을 차단하는 문이 없다면 집은 길거리나 다름없는 통로가 될 것이다. 문은 우리에게 세상과 만나는 길을 열어주고 또 세상과 차단된 우리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열리고 닫히는 문에 의해서 공간을 안과 밖으로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삶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삶은 주어진 하나의 공간을 문이라는 도구에 의해 둘로 나누는 데서 시작된다. 문을 닫음으로써 바깥 세상과 구별되는 온전한 나의 영역이 생긴다. 나의 존재는 저 바깥의 나 아닌 것의 존재에 의해서 성립된다.

노숙자의 고통은 필요할 때 닫을 수 있는 이러한 문을 가질 수 없는 데 있고, 감옥에 갇힌 사람의 고통은 필요할 때 열 수 있는 이러한 문을 가질 수 없는 데 있다. 한쪽은 광장의 고통이고 다른 한쪽은 폐쇄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공간은 하나뿐이며 그것을 둘로 나누어 열고 닫을 수단과 권리는 그들의 손에 주어져 있지 않다. 노숙자에게서는 나와 바깥 세상이 하나로 뒤섞여버림으로 인해서 세상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따로 구분하고 규정할 방법이 없어지고, 수감자에게서는 바깥 세상이 사라져버림으로 인해서 세상과 관계를 맺고 그 반대쪽에 있는 나를 규정할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태다. 나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권한과 자유를 상실함으로써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거리에 흘러넘치는 남들이 되거나 고립된 무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를 생각한다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방 한칸일지라도 열쇠를 가지고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는 문을 갖고 있는 것만도 눈물나도록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은 물리적인 공간만을 구분하고 연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연속적인 시간을 구분하고 어떤 사건이나 시점을 상징하는 메타포로도 쓰인다. 등용문이니 관문이니 하는 비유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시간적인 삶을 공간의 개념에 의존해서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말할 때, 또는 시험을 통과했다고 말할 때, 우리가 여기서 열고 통과하는 것은 다름 아닌 문의 이미지이다. 새로운 시대라거나 시험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문의 이미지를 통해서 가시적으로 구체화된다. 빗장이 닫혀 있던 그 문을 열고 들어섬으로써 우리는 그 전에 속해있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기념비의 여러 유형들 중에 문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개선문을 세우고,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서 독립문을 세운다. 그것은 하나의 국가가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가시적인 구조물을 통해 선언적으로 표현하려 할 때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였다.

문은 일종의 약속이며 도전이다. 그뒤에는 지금 이쪽에는 없는 다른 공간이 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문들의 약속과 그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서보려는 호기심에 의해 지속된다. 그 약속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또 실망과 좌절을 준다. 그리하여 어떠한 약속도 더이상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게 될 때, 더이상 낯선 문들을 열어볼 의욕과 용기를 갖지 못할 때 삶은 끝난다. 물론 여기에도 퇴로는 있다. 지나온 문들을 통해 과거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 삶을 지속할 수는 있다. 내가 지금 어느 문 앞에 있는지 때때로 살펴볼 일이다.

글·이미지 안규철/ 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