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0일 새벽 2시 용산의 한 극장, 일군의 인파가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다. “잘 지냈어?”, “너는?” 하는 소리를 조용조용 나누며 사람들이 상영관 안으로 입장한다. 이곳은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기술시사가 열리는 곳이다. 기술시사란 영화의 99% 완성 단계에서 스탭들을 상대로 하는 상영으로, 기술적 하자가 없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자리다. 내가 이 자리에 동참한 것은 남들보다 먼저 영화를 보고 기사를 쓰려는 ‘기자정신’ 때문이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들은 아는 얘기지만, 나는 그 영화의 스탭으로 참여했다. 이름하여 제작부 막내. 촬영 전에는 로케이션할 장소를 헌팅, 섭외하고 촬영시에는 스탭들을 먹이고, 재우고, 달래는 일이 내 임무였다. 지난 1월 <씨네21>을 나와 “인생을 개조하겠다”는 큰소리를 치며 영화현장으로 들어갈 때는 나름의 꿈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하다보니 크랭크업을 끝내 보지 못하고 촬영 후반에 그만두고 다시 이곳으로 들어오게 됐다(그것에 관해선 언젠가 상세하게 이야기하겠지만, 제발 ‘영화사와 싸웠다더라’는 헛소문은 믿지 마시길).
다시 시사회장. 여러 스탭들이 달뜬 표정으로 쑥덕거리고 있다. 내가 담당한 포커스는, 렌즈는, 세트는, 소품은, 녹음이 잘됐는지 궁금해하는 분위기다. 불이 꺼지고 영사기가 돌아가자 자연 꿀꺽, 침이 넘어간다. 아, 그런데 이상하다. 영화가 안 보인다. 아니, 정확히 말해 프레임 안의 영화는 보이지 않고, 대신 프레임 바깥에서 영화 찍는 모습이 보인다. ‘저 공사장 찾아내느라 X빠지게 고생했지…’, ‘아니 저렇게 클로즈업해서 찍을 걸 뭐 그리 까다롭게 장소를 골랐다냐?’ 등등의 상념과 함께 ‘저 장면 찍던 날은 날씨가 너무 더웠지만 얼음을 준비 못해서 욕을 먹었었지, 쩝…’, ‘저 뒤쪽에서 교통통제를 하고 있던 내 모습이 혹시 찍힌 것 아냐?’ 하는 잡스런 관심이 영화의 ‘이해’를 가로막는다. 그나마 식당을 예약하느라, 스타의 사인을 받으려는 행인들을 저지하느라 카메라와 멀리 있을 때 찍은 장면 정도만이 ‘아, 저런 장면이 있었군’ 하며 집중하게 해준다.
영화가 끝난 뒤, 뭘 봤는지 헷갈려하는 내게 비슷한 급수의 ‘주니어’ 스탭이 묻는다. “형, 음악이 좀 그런 거 아녜요? 그리고 편집도….” 이런, 이 친구는 영화를 집중해서 봤잖아. 다른 스탭들도 “그 장면에서 정우성이랑 손예진이랑… 까르르르” 하면서 총총히 극장을 빠져나간다. 이런, 이런. 그렇담 이 ‘영화보기의 어려움’이 어디서 기인한 거란 말이냐.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내가 참여한 첫 영화란 사실이 신기했고, 당시의 어려움이 북받쳐올랐기 때문이었겠지. 그런 게 초심자의 설레발 또는 엄살이란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실 터. 고작 6개월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영화 일을 한 주제에 나 혼자만 대단한 고생이나 한 듯 ‘아아, 나의 스탭 시절이여!’라고 부르짖으며 영화를 본 것 같다. 지병인 ‘홍안증’이 도진다.
민자역사의 거대한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부르짖는다. 대단하다, 스탭들이여. 국회의원님들을 경악하게 한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정의 심지를 불태우며 현장을 지켰고, 영화도 똑똑히 볼 수 있다니. 그대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만국의 영화스탭들이여, 그대들도 존경한다. 그런데, 묻고 싶다. 프레임 안쪽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클리닉은 없나요?
문석 mayday@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