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일본영화 회고전 ‘사랑과 청춘 1965-1998’ [3]
김혜리 2004-11-09

당대를 반영한 청춘영화, 로망포르노 중심의 주요 상영작 14편

전후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동경 あこがれ(1966)

감독 온치 히데오 l 출연 아라타마 미치요, 나이토 요코 l 85분 l 컬러

고아원 ‘의남매’ 러브스토리. 무정한 아버지는 고아원 현관에 어린 딸을 밀어넣고 황망히 사라진다. 아빠를 기다리며 울기만 하는 노부코에게 소년 이치로가 “우리들 아빠는 아무 데도 없어”라고 가르친 날부터 둘은 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세월이 흘러 이치로는 부유한 그릇 가게에 입양되고 노부코는 음식점 종업원 자리를 전전하며 떠돌이 막노동자인 아버지를 뒷바라지한다. 이치로는 아버지에게 매인 노부코를 안타까워하지만 며느리 욕심이 큰 이치로의 양부모는 중매에 열심이다. “부모는 있어도 없어도 골치구나.” 고아 출신 이치로가 읊조리는 대사는 과거와 절연한 새로운 가족을 꿈꾸었던 당시 젊은이들의 욕망을 드러낸다. 브라질 이민으로 영원히 가족의 관계망을 떠나는 이치로의 생모가 모든 갈등을 해소한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고슴도치 같은 소녀에서 살기 위해 어디에나 적응할 수 있는 처녀로 변모하는 나이토 요코의 연기가 볼 만하다. 열정과 책임감의 갈등이라는 큰 테마를 남녀 주인공뿐 아니라 꼼꼼한 조역의 배치를 통해 표현한 구조가 단정하다. 화단과 꽃병 등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구석에 꽃을 걸어 찍은 화면구성이 재밌다.

해후 めぐりあい(1968)

감독 온치 히데오 l 출연 구로사와 도시오, 사카이 와카코 l 92분 l 컬러

공업도시 가와사키의 출근길. 대기업 오리엔털 자동차에 다니는 수선스런 청년 츠토무는 우연히 만난 베어링 가게 점원 노리코에게 “나도 댁도 평범한 이름이네요. 평범한 사람들끼리 잘해볼까요?”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츠토무의 명랑함 뒤에는 만주에서 귀국한 뒤 무기력해진 아버지와 대학 진학을 고집하는 동생을 짊어진 장남의 피로가 숨어 있다. 역시 생활고에 시달리는 처녀가장 노리코는 미망인인 어머니가 삼촌의 청혼까지 받자 고민에 빠진다. 트럭을 빌려 떠난 데이트에서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애환을 나누는 두 사람. 그러나 모처럼 삶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귀가한 두 남녀는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실직이라는 비극을 각자 맞이하고 연락이 끊긴다. 카메라가 움직이면 구석마다 자리한 식구들이 하나둘 드러나는 협소한 아파트 공간, 당시 대기업 사원들의 자부심과 스트레스를 잘 보여주는 일화 묘사가 생동감 넘친다. 늘 춤추듯 흥청거리는 구로사와 도시오의 움직임은 아마도 그의 전매특허 연기 스타일인 듯하다. 눈동자의 광채를 살린 클로즈업들이 미소를 자아낸다. 배우 겸 감독인 다케나카 나오토가 이 작품을 ‘내 청춘의 영화’로 꼽으며 트럭 짐칸의 러브신을 특별언급하기도 했다.

오빠의 연인 兄貴の戀人(1968)

감독 모리타니 시로 l 출연 가야마 유조, 나이토 요코 l 84분 l 컬러

의좋은 오누이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에로스에 착안한 성장영화. 중류층 가정의 건실한 아들 텟페이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높고 혼담도 줄을 잇는다. 하지만 만원 출근 전차 안에서 남몰래 오빠에게 기대기를 즐기는 여대생 동생 세츠코는 오빠의 혼담을 내심 꺼린다. 그러나 늘 맛난 차를 끓이는 여직원 가즈코가 집안 사정으로 퇴사하자, 텟페이는 전에 없던 감정을 느낀다. 텟페이를 좋아하지만 야쿠자 오빠를 둔 가즈코는 망설인다. 유년이 끝났음을 깨달은 세츠코는 가즈코를 찾아가 “오빠는 오빠, 나는 나”라고 말한다. 샐러리맨들의 풍속, 도시생활의 속도감, 60년대 말 젊은이들이 추종한 패션을 엿볼 수 있다. 아이돌 스타 나이토 요코와 사카이 와카코가 동시에 출연했다는 점이 개봉 당시 셀링 포인트였다. 모리타니 시로 감독은 이후 1973년 <일본 침몰>로 큰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마을에 샘이 있었다 街に泉があった(1968)

감독 아사노 마사오 l 출연 구로사와 도시오, 사카이 와카코 l 88분 l 컬러

도쿄의 장남을 믿고 홀어머니와 세 동생이 상경한다. 그러나 첫날 환영잔치 이후, 어머니와 세 아들은 창고에 보금자리를 꾸리고 슈퍼마켓, 주유소, 정비소, 신문 보급소로 흩어져 취직한다.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이 식당 종업원 유미코와 삼각관계를 이룬 가운데, 어머니도 식당 주인과 맺어진다. 셋째아들 역인 가수 미타 아키라의 노래가 큰 역할을 하는 ‘가요 영화’. 식구들이 웃는 얼굴로 뿔뿔이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는 결말이 신선하다. 아사노 마사오 감독은 온치 히데오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다.

고교생 동반자살, 순애 高校生心中 純愛(1971)

감독 오비모리 미치히코 l 출연 세키네 게이코, 시노다 사부로 l 85분 l 컬러

고교생 연인 요시오와 요코에게 비극이 닥친다. 요시오의 형이 우발적으로 부모를 죽게 만든 것. 남겨진 요시오는 형의 재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고, 요코는 요시오의 기차에 충동적으로 뛰어오른다. 신혼부부 같은 행복도 잠시, 상류층인 요코 부모의 추적으로 요시오는 유괴범으로 몰린다. 삶에 품었던 희망을 하나둘 어른들에게 부정당한 어린 연인은 죽음을 결심하고 서로의 마지막 모습을 눈으로 사진 찍는다. 형의 친구를 통해 학생운동이 거론되나, 내러티브와 잘 연결되진 않는다. 데라와키 겐 문화청 문화부장은 “한국영화 <클래식>을 보면서 상기했던 영화다. 한국영화에서는 남자가 베트남으로 가고 이 영화에서는 커플이 동반자살한다. 최근 일본영화 속 죽음은 단순한 카타르시스를 지향하고 있지만, 이 영화의 죽음은 삶을 강조하기 위해 쓰였다”고 평가했다.

놀이 遊び(1971)

감독 마스무라 야스조 l 출연 세키네 게이코, 다이몬 마사아키 l 90분 l 컬러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1957년 데뷔한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은 하층민에 초점을 맞추고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한 네오리얼리스트 성향의 감독이었다. 다이에이 스튜디오가 도산하기 직전에 만들어진 <놀이>는 불행과 타락에 쫓기고 지친 젊은 여자와 남자가 만나 일상의 궤적을 벗어난 아주 특별한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다. 공장에 다니는 여자에게는 몸이 불편한 언니와 폭력적인 아버지가 있고 빚에 쫓기는 청년은 죄악으로 목까지 진창에 빠져 있다. 그들이 마지막 순수를 지키기 위해 도망치듯 보내는 밤. 좋은 호텔에 들어선 두 사람은 온수가 나오는 욕실과 좋은 음식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감동하고 마침내 거울 앞에 나란히 누워 “예뻐요”, “당신도 예뻐요”라는 대화로 서로를 축복한다. 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놀이>를 서슴없이 걸작으로 칭하며 단순한 성격과 상황, 테마를 마스무라 야스조의 데뷔작 <키스>에 비교한 바 있다.

학생 아내 남몰래 울다 學生妻 しのび泣き(1972)

감독 가토 아키라 l 출연 가타기리 유코, 시라카와 가즈코 l 71분 l 컬러

소녀가 공장의 기계에 기대어 중년 사내의 몸을 받아내고 있다. 가수 지미 모리카와의 그루피 출신 고교생 연인 유코가 애인의 결근을 무마하고 있는 중. 유코는 신처럼 사랑하고 노예처럼 착취당하지만 지미는 만두 한끼 사준 뒤 여자친구를 팔아넘겨 윤간까지 당하게 만든다. 그래도 남자가 손짓하면 다시 좋아라 따라나서는 바보 같은 소녀. 집 보기를 맡은 깨끗한 아파트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것도 잠깐. 여자가 철저히 희생한다는 법칙은 끝까지 관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