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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 회고전 ‘사랑과 청춘 1965-1998’ [1]
김혜리 2004-11-09

11일10일 막 여는 대규모 일본영화 회고전 ‘사랑과 청춘 1965-1998’을 미리 가다

영화로 보는 일본, 그 낯설지 않은 과거

듣도 보도 못한 영화들이 몰려온다. 우리가 이들을 듣도 보도 못한 까닭은, 오지에서 만들어진 영화라서도 아니고 해괴망측한 영화여서도 아니고 희대의 걸작이라서는 더욱 아니다. 이유인즉슨 그 반대에 가깝다. 11월10일부터 24일까지 2주일간 서울 메가박스에서 상영될 44편의 영화(개·폐막작 포함 46편)는 가장 가까운 나라의 가장 평범한 영화, 1965년부터 1998년까지 보통 일본 국민들이 퇴근 뒤 데이트를 하며 보았던 일본영화들이다. 국제영화제 수상경력도 없고 시네마테크에서 특별전을 기획할 만한 거장의 작품도 아닌 터라, 한국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1998년부터 횟수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오락영화들이다. 같은 이유로 한국뿐 아니라 일본 바깥에 소개된 일이 거의 없는 이들은 기차역 없는 마을처럼 지도에서 눈에 띄지 않는 일본영화의 영토인 셈이다. 요컨대 ‘일본영화: 사랑과 청춘 1965-1998’은 질보다 양이 중요한 영화제다. 상영작이 보잘것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키네마준보> 독자투표와 일본 문화청의 견해를 종합한 프로그래밍은 당대 일본 사회상을 비추는 거울이 될 만한 영화를 우선으로 꼽았다. 거울 조각이 많을수록 반영의 상은 온전해지게 마련. 개·폐막작을 제외하면 편당 1천원으로 저렴하게 매겨진 이번 영화제의 관람료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의 취지에 안성맞춤이다. 영화제 기간 중에는 가와이 하야오 문화청 장관과 이창동 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대담을 비롯해, 초청작에 참여한 시나리오 작가와 촬영감독들이 한국의 작가, 촬영감독과 마주앉는 심포지엄도 열린다.

46편에 이르는 상영작에 젓가락을 대기 전에 염두에 둘 개념은 ‘프로그램 픽처’다. 프로그램 픽처란,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일본 영화계를 주도하며 제작사와 극장을 동시에 소유했던 쇼치쿠, 도호, 도에이 등 대형 스튜디오들이 자사 극장을 채우기 위해 연속극 찍어내듯 만들었던 영화들. 프로그램 픽처의 잔영은 1980년대까지 찾아볼 수 있다. 최소 비용으로 최다 편수를 만들어야 했으므로 프로그램 픽처의 다수는 자연히 장르영화였고, 각사의 전속 스타들이 나오는 영화들이었다. 포괄하는 연대의 초기작 중 프로그램 픽처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이번 회고전의 꾸준한 관객은, 여러 영화 속에 거듭 등장하는 사카이 와카코, 나이토 요코, 구로사와 도키오, 세키네 게이코 등의 옛날 일본 은막 스타들과 낯을 익히게 될 것이다.

한편 ‘사랑과 청춘’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회고전의 프로그램은 당대의 대중영화 중에서도 청춘영화와 로망포르노에 집중하고 있다. 행사를 주최한 일본 문화청 데라와키 겐 문화부장은 “야쿠자영화, SF, 시대극 등 다른 장르도 많았으나 동시대 젊은이들의 삶을 그대로 포착한 장르는 로망포르노와 청춘영화였다”고 설명한다. 영화제 개막작 히로키 류이치 감독의 <바이브레이터>도 로망포르노의 전통을 계승한 2003년작. 남성 관객의 전유물이었던 장르를 여성 주체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번 회고전에서 소개되는 온치 히데오 감독의 <동경>과 <해후>,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놀이> 등 60, 70년대 일본 청춘영화에서 흥미로운 점 두 가지는, 이들 청춘이 젊은 노동계급의 동의어라는 점과 빠른 속도로 변모하는 산업사회의 젊은이들을 강고히 사로잡고 있는 가족의 그림자다. 도시남녀의 순애보와 로맨틱코미디에서도 가족은, 극복해야 할 과거이자 주인공들이 새롭게 만들어야 할 미래로서 현재를 지배한다. 이는 할리우드 청춘영화와의 차이인 동시에 한국 TV드라마와의 공통점으로 보이는데, 최근 한류 붐이 일본의 중년 남녀가 젊은 날 즐겼던 이 청춘영화들의 기억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 추측도 부추긴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의 한류 붐에 민감하게 반응해온 일본 언론들은 서울에서 개최되는 일본 대중영화의 대형 회고전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일류(日流)가 일어날 수 있을까?”로 요약될 수 있는 주요 일간지들의 논조는 허황되게 들린다. 그보다는 회고전 한국 관객에게 보내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익살스런 메시지가 마음을 끈다. “상영목록을 보면 초창기에는 쇼치쿠, 도호, 도에이 같은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가 많고 뒤로 갈수록 독립영화가 많다. 이것이 일본영화의 흐름이며 일본 관객 마음의 흐름이기도 하니, 그것을 여유롭게 즐기시기 바란다. 상영작 중 첫 번째 영화인 <동경>과 최근작 <바이브레이터> 사이의 갭을 이해한다면 전후 일본을 다 이해했다고 보면 된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초대사처럼, ‘일본영화: 사랑과 청춘 1965-1998’은, 당대에는 리얼리즘과 무관하게 공식대로 만들어진 오락영화들이 시간의 부피로 말미암아 역사적 삶의 기록으로 변모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다. 누군가는 여기서 일본사회와 우리 사회가 통과해온 일상 풍경의 흡사함에 흠칫 놀랄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는 구로사와 아키라, 이마무라 쇼헤이, 스즈키 세이준 같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저명한 감독들의 영화세계가 어떤 흐름 안에서 혹은 어떤 흐름과 부대끼며 배태되었는가를 발견할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적당한 원근감이다. 그것은 획득하는 데에 짐작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는 감각이며, 이번 회고전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유난히 지체된 그 시간을 만회하려는 작은 시도다(영화제 홈페이지: www.j-mef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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