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풍>(1995)이라는 PSB(부산방송) 개국 특집드라마가 있다. 서울 샌님 하나가 부잣집 부모 밑에서 방황하다가 어찌어찌해서 자갈치시장까지 흘러오게 되고, 투박하게 살아가는 시장 사람들의 삶에 감동받아 건전청년으로 교화된다는 이야기다. 서울 샌님 역의 욘사마와 길다방 아가씨 역의 진재영이 주연이었던(조연으로 등장한 횟집처녀 장서희도 있다), 500만 부산광역시민들 사이에서도 ‘카더라’ 구전으로만 떠도는 전설의 드라마다. 여기서 부산사투리는 서울말의 세련됨에 대구를 이루는 투박한 이방인의 언어였다. 이러니 진재영과 욘사마가 맺어질 리가 없다. 문명어를 구사하는 문명인은 결국 문명으로 돌아갈밖에. <해풍>의 부제는 “자갈치의 포카혼타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부산 출신이다. 언어에 나름대로 소질이 있다 자부하는지라, 경쟁지에서 일하는 서울 경력 수년의 J기자보다는 더욱 상큼한 서울말을 구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은 ‘나 술 취했어’를 뜻하는 부산사투리 ‘나 술대써’(술됐어)를 사용해 ‘멍게탕 기자’ P모 선배를 회복 불능의 절망으로 빠뜨린다(뭐? 술이 뭐가 돼?). 다행히 <친구> <똥개> <우리형>이 차례로 새끼까듯 등장하자 꽃미남도 사투리를 쓰는 게 스크린에서 어색하지 않다 싶었다. 나 같은 미청년(쿨럭…)이 사투리를 구사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고 감격했다. 하지만 직업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 영하로 은자 배우로 마이 큿데요”(이번 영화로 이제 배우로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라고 인터뷰를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고, 촬영감독에게 “날씨가 파일 때는 조맹을 우짭니까?”(날씨가 안 좋을 때는 조명을 어떻게 하세요?)라고 물을 수도 없었다.
서울로 스카우트된 학원 강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떠드는 여학생들을 향해 “가시나들, 조디를 확 꼬매뿔라”(입술을 확 꿰매버릴까보다) 했더니 놀라 오열하는 여학생들 때문에 이 소심한 남자 패닉에 빠졌었단다. 이러니 영화계의 경상도 꽃미남, 꽃미녀 배우들은 서울말을 ‘학실히’ 연습해서 입조심을 ‘단디’해야 한다. 극도의 관리로 세련된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한 것이다. 창원 청년 강동원이 서울말 코치를 받는다는 이야기, 부산 처녀 진재영이 입 안에 구슬 물고 연습했다는 일화는 코끝을 찡하게 아리게 한다. 부산진여고 출신의 최지우가 ‘실땅님’을 외치면, 자지러지는 서울 시민들의 웃음소리도 가슴 아프다. 원래 부산말이 서울말처럼 입술 위에서 새침하게 딱 끊어쳐지는 말이 아니다. 나도 가끔 “편입당님”(편집장님)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다 이해한다. 그러니 이제는 강동원이 스크린위에서 자유롭게 “누나. 내 몬알아보나. 태스이다, 태스이”(태성이다, 태성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싶다. 진정한 지역영화는, 피냄새 물씬한 부둣가의 누아르가 아니라 부드러운 꽃미남, 꽃처녀들의 로맨틱한 고백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게 옳지 않겠나. 스크린 위의 부산 남자들도 칼 말고 사랑 묵고 살고프다.
PS: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나이의 언어=부산 사투리”라는 도식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초를 찬양하는 영화들의 언어가 하필이면 경상도 사투리인 게 아니라, 경상도 사투리로 만들어져도 서울 중심의 영화시장에서 겨우 팔아먹을 수 있었던 소수의 영화들이 하필이면 그랬던 것이겠지요. 무뚝뚝해 오해받기 쉬운 부산 사투리는 어째 좀 위로받을 필요가 있나이다.
김도훈 groove@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