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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들
안규철(미술가) 2004-10-29

우리 주위에는 평소에 그 존재감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사물들이 많이 있다. 사람의 시선을 끌며 당당하게 자기를 주장하는 물건들의 그늘에서 이들은 ‘엑스트라’로서 가까스로 제 위치를 지키며 그 나름의 존재를 이어간다. 옷의 단추도 그런 물건들 중 하나다. 셔츠에 달린 단추의 존재는 그것들을 매일 채우고 푸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다. 셔츠는 주목을 받지만 단추에는 웬만해선 눈길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목걸이 같은 장신구와 친척관계라 할 수 있으나, 값싼 대량생산의 길에 들어선 이래 그 자체가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남성 정장에서 와이셔츠의 단추는 그나마도 넥타이에 의해 가려진다. 이 영원한 단역의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뜻밖의 부재 또는 왜곡을 통해서 드러난다. 단추가 떨어져서 셔츠의 소매를 채울 수 없게 되었을 때, 또는 채워야 할 단추가 풀어졌거나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존재를 의식한다.

어렸을 때 옷의 단추를 채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손가락들을 상당히 섬세하게 다룰 줄 알아야 단추 구멍에 단추를 밀어넣거나 다시 끄집어낼 수 있고, 그 일에 익숙해진 다음에도 단추를 엉뚱한 자리에 끼우고 있지 않은지 항상 주의해야 한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이 동작은 SF영화에서처럼 사람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려는 과학자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단추는 원시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일종의 자물쇠이며, 그것을 열고 닫는 열쇠는 바로 우리의 손가락이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는 몇개의 손가락을 단추의 열쇠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요령을 터득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혼자 옷을 입을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하는 기술로서, 이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아이는 유아의 단계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된다. 단추에 의해서 나는 나와 바깥세계, 나 아닌 것과 나를 구분하는 법을 배우고, 그럼으로써 내가 누구인지를 의식하는 독립된 개체로서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한편 이와는 다른 종류의 단추들이 있다. 옷의 단추와는 전혀 구조와 기능이 다른데도 우리는 기계들에 붙어 있는 그 사촌들에도 같은 이름을 사용한다. 형태가 서로 비슷하고, 그것들을 다루는 신체부위가 손가락 끝이라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컴퓨터 자판에, 휴대전화에, 엘리베이터에, 텔레비전 리모컨에 붙어 있는 이 새로운 단추들은 우리의 일상생활 구석구석에서 매일같이 자신들의 영토를 늘려가고 있다. 그것은 옷의 단추들처럼 여전히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장치 본체의 부속품으로서 보조적인 위치에 머물며 얌전히 우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들은 결코 옷 단추와 같은 세계의 단역이라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일에서 이 단추들에 의존하며, 단추가 없으면 불안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미 우리 주변에 급속히 늘고 있다. 이런 유형의 단추는 인류문명을 치명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핵공격 시스템에도 들어가 있다. 이 새로운 단추들의 고전적인 원형은 아마 피아노나 타자기 같은 것이지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없다. 손을 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했던 미다스처럼 그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가볍게 누르기만 하면 된다. 아이가 옷 단추를 채우는 법을 배우거나 피아노와 타자를 배울 때처럼 공을 들여 손가락을 훈련시킬 필요가 없다. 필요한 기술은 이 단추 뒤에 프로그램으로 내장되어 있다.

손끝으로 누르기만 하면 되는 이 친절한 단추들에 의해 사람들은 세상과 접속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세계는 단추 뒤에 있으며 그것을 누르면서 나는 누가 만든 것인지도 모르는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에 개입한다. 예전에 엑스트라였던 단추가 세상과 우리의 미래를 지배하는 주인공의 지위에 오르고 있다.

글·드로잉 안규철/ 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