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옥, 인도, 아오리, 국광, 스타킹, 후지. 내가 어릴 적에 알던, 대개는 흔히 먹던 사과의 이름들이다. 이중에서 후지(富士)는 값이 비싸고 귀한 편이었고, 가장 흔하게 먹던 것은 국광이나 홍옥이었다. 나는 특히 홍옥을 좋아했다. 일단 더할 수 없이 새빨간 빛깔의 매혹을 피할 수 없었다. 능숙한 화가의 터치처럼 그 사이를 가르며 여기저기 누렇고 퍼런 아주 다른 색깔이 슬며시 끼어들어가 있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코를 찌를 듯한 강렬한 향기, 먹고 난 뒤에도 손과 입 주변을 맴돌던 쏘는 듯 아름다운 잔향. 게다가 달고 시고 씁쓸함이 뒤섞인 그 맛의 오묘한 강렬함은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돌게 만든다. 과즙의 양으로 보면 후지를 당할 수 없다고들 했지만, 그 강렬한 맛과 향으로 손에 잡는 순간부터 입 안을 충분히 적시며 시작하기에 거기서도 결코 후지에 못지않았다.
지금도 나는 가을이 되면 홍옥을 찾는다. 일삼아 먹을 것을 사러다니는 일은 거의 없지만, 사과가 놓인 좌판을 보면 혹시 홍옥이 있나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가장 흔하던 사과였지만 홍옥을 찾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홍옥만이 아니다. 다른 사과들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초가을에 아오리가 잠깐 등장하고, 늦가을에 국광이 잠시 보이다 사라진다. 계절에 상관없이 사과가 진열되어 있지만, 그건 모두 어김없이 후지들뿐이다. 게다가 이젠 그나마 단맛마저 아주 단조로워지고 냉동보관 덕분에 물기도 말라 퍽퍽해진 후지들뿐이다. 그 많던 홍옥은 모두 어디 간 것일까?
그래, 홍옥을 내던 나무들이 모두 죽은 것이다. 말라죽은 게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뽑혀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후지를 내는 나무가 새로 심어졌을 것이다. 좀더 돈이 되는 상품을 위해, 좀더 비싸게 팔 수 있고 좀더 쉽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사과나무를 심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 많던 사과의 품종들은 후지로 ‘단일화’되었을 것이다.
알겠지만 이런 일은 단지 사과나무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벼도 그렇고, 소도 그렇다. 상품으로 생산되는 모든 것은 화폐를 지향한다. 좀더 많은 화폐와 좀더 쉽사리 바뀔 수 있기를 바란다. 화폐는 그 모든 상품들을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란 점에서 상품의 ‘신’이고, 그 모든 상품들이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란 점에서 상품의 ‘제일 원인’이다. 조그마한 흠이나 결함만으로도 그 가치가 손상되는 상품에 비해 더러워지고 찢어져도 그 가치를 완벽하게 보존하는 것이란 점에서 가치의 ‘이데아’고, 상품 자신이 그 불완전한 세계에서 벗어나 도달하길 바라는 꿈을 꾸고 있다는 점에서 상품세계의 ‘천국’이다.
비슷한 사과들이 있다면, 그 가운데 좀더 돈이 되는 후지가 살아남는 것은 화폐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선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화폐는 돈이 안 되는 것들을 단종시키고 멸종시킨다. 그것은 상품세계를 만들고 지배하는 ‘신’의 심판인 것이다. 이를 경제학자들은 ‘가치법칙’이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생물의 진화를 그저 생물학적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것만으로 정의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홍옥이나 다른 사과들의 ‘도태’는 생물학과는 상관없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도태가 아니라 화폐에 의한 도태이고, 생물학적 도태가 아니라 경제학적 도태다. 그렇다면 상품과 화폐에 대한 경제학적 이론없는 진화론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가치법칙’은 그 새로운 진화론의 첫째 법칙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진화에서 결정적인 차이는, 자연도태는 환경에 따라 도태하는 것과 적응하는 것들이 달라지기에 생물학적 진화는 종적인 다양성을 향해 나아가는 데 반해, 경제학적 도태는 돈이 안 되는 것은 모두 멸종되고 돈 되는 것만 살아남기 때문에 경제학적 진화는 종적인 단순성, 단일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이다. 사람이라고 해서 이 냉정한 ‘화폐진화론’의 법칙에서 면제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결국은 화폐로 귀착되는 저 획일화된 단순성으로 진화된 세계, 모든 것을 거대한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화폐의 블랙홀에서 벗어나는 선들이 그려질 수 없다면, 미래에서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 그래서 더욱더 홍옥이 먹고 싶다. 좌판에서 홍옥을, 아니 국광이나 인도, 스타킹을 쉽게 만나게 되길 바란다.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너머’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