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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장진(영화감독) 2004-10-22

휴대폰 번호 열한 자리 중 어느 하나를 잘못 누른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보니 타일러와 박경림을 혼합해놓은 것 같은 우리 엄마의 목소리가 이토록 고와진 거냐… 아니면 요즘 달여드신 한약 덕을 보셔서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이냐?… 그래 내가 전화를 잘못 건 것이다…

나 어, 난데….

목소리 여보세요….

나 (당황 시작) …여보세요…?

목소리 네, 말씀하세요….

나 어… 저기….(뭐라 해야 됩니까!!! 순간 엄마 이름을 까먹었다.)

목소리 여보세요.

나 (본능처럼 익숙한 호칭이 나온다.) … 거기 종팔이 엄마 없나요?(물론 내 이름은 종팔이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나오는 거 보면 우리 엄마는 날 낳으면서 당신의 이름을 잃어버리셨나보다.)

목소리 종팔이 어머님이요?

이쯤에서 잘못 걸었네 하며 그냥 끊는 몰상식한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나의 실수로 이 사람의 시간을 뺏은 것뿐더러 이 여자의 목소리는 너무나 감미로워 천상에서 변성기를 보낸 천사가 분명하리라고 생각이 들 만큼….

나 아… (약간 순진한 척 버벅대며) …제가 전화를 잘못 건 거 같은데요… 이상하네….

이쯤 되면 어떤 이들은 네∼ 하면서 끊기도 하고 똑바로 걸으세요 아니면 손가락이 뭉툭해요? 왜 잘못 걸어요? 뭐 이렇게 받아치기도 하는데 이 천사의 목소리는… 적어도 그러지 않았다….

목소리 실례하지만 몇번으로 거셨어요?

내게 관심을 보이며 한발 더 가보자 이거다. 천사의 목소리가 내게 질문을 했다.

나 (여전히 순수한 척) 네… 저기… 011… 9797에 ****번 아닌가요?(사실 우리 엄마 번호를 실제로 쓸 수도 있는데 씨네에 나가고 난 뒤에 우리 엄마가 힘들어지실 거 같아서.)

목소리 어, 번호는 맞는데요… 이상하네요.(그리고 잘은 확인이 안 됐지만 분명 살짝 웃었다. 후후… 웃음소리가 연하게 묻었다.) 다시 확인해보시겠어요?

나 어… (떨린다) 네 제가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릴까요?(이런 병신, 이런 멍청이… 이게 뭔 말이냐? 확인하면 했지 뭔 연락을… 이런 쪼다… 이런….)

목소리 그러세요….(뭐냐? 이건) 다시 한번 걸어보시고… 다시 제가 받으면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하죠 뭐….^^

나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아… 네… 하하하… 상당히 재미있으신 분이군요….

목소리 호호… 그럼… 끊을게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저리도 고운 목소리로 날 저처럼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이 몇이나 있더냐…. 그리고 그녀도 분명 내게 어떤 알 수 없는 끌림을 받았다. 동물적인 직감으로 많은 정보가 유추되어진다. 목소리 톤으로는 이십대 초반 혹은 곱게 자란 중반… 억양을 봐선 백퍼센트 서울 여자… 단어 사용과 악센트를 생각해보면 대졸 이상의 학력… 현재 수입이 괜찮은 직장여성일 확률 아주 높음… 외모…? 목소리 들으면 딱 느낌이 옴.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고 하늘이 눌러준 번호다… 엄마 고맙습니다… 아, 만약 아빠한테 걸다가 잘못 걸었으면 이 여자를 만나지 못했겠지… 역시 우리 엄마….

선택은 하나다. 어떤 바보는 이럴 때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 정확하게 눌러 엄마에게 걸지도 모르지만 난 하늘의 기회를 저버리지 않는다.

손가락을 움직여 재발신 버튼을 누른다… 그래 바로 이거지. 그녀의 번호가 몇번인지 내가 어떤 번호를 눌렀기에 그녀가 받았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재발신 기능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뛰어난 발명 중 하나다.

벨이 울린다… 좀 이른 감이 있지만 난 고백하리라….

‘저기요… 저에게 이렇게 친절히 말해주는 사람은 댁이 처음입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저요… 꽤 괜찮은 놈입니다… 이름은 종팔이라고….’

울리던 벨이 멈추고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 저기요… 접니다… 인연… 하하하… 만나고 싶습….

목소리 종팔아!!(보니 타일러와 박경림이 섞인 목소리다.) 에미다….

나 엄마?

목소리 전화했었냐? 아, 미장원에서 내 전화기랑 똑같은 전화기가 있기에 잘못 들고 나왔다가… 방금 바꿔 가지고 나왔다… 헤헤헤… 정신이 없어서 요즘… 근데 왜? 왜 전화했어?

세상은 말이다… 아∼ 세상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들로 꾸미며 살아간다.

나 엄마… 종팔이 어머님… 언능 오세요… 밥차려줘야지 배고프잖아.

목소리 간다….

장진/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