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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마스터클래스 현장
2004-10-12

영화는 타인의 시선과 만나야한다

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12일 오후 1시 부산 메가박스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앙겔로풀로스는 전날 마스터클래스를 가졌던 허우 샤오시엔과는 달리 자신의 삶과 영화를 간추린 강연을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신의 영화처럼 유장한 대답 속에는 잔인한 시대를 영화로 견뎌냈던 노감독의 일생이 녹아있었다. “나는 한번도 영화를 직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영화는 내게 여행과도 같았고, 내 삶에서 가장 강한 순간이었다”이었다고 말한 그는 “당신들은 왜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두 시간 동안의 마스터클래스를 시작했다.

두 명의 학생으로부터 대답을 들은 앙겔로풀로스는 “당신은 영화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영화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가. 언젠가는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해야 한다. 플라톤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영혼을 알기 위해선 다른 이들의 영혼 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는 아홉 살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마이클 커티즈의 영화 <더러운 얼굴의 천사들>을 보았다. 그는 전기의자에 앉기 직전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제임스 캐그니의 외침을 듣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순간 영화는 “악몽처럼, 벽에 투영된 그림자와 외침을 통해서” 그의 삶에 들어왔다. 앙겔로풀로스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영화의 주인, 영화에 서명을 남기는 감독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됐고, 60년대에 프랑스 영화학교 이덱에서 영화를 배웠다. 보수적인 이덱의 교수는 앙겔로풀로스가 클로즈업이나 롱 숏 대신 360° 파노라마 촬영을 하겠다고 하자 그런 천재성은 그리스에 가서나 팔아먹으라고 면박을 줬다. 앙겔로풀로스는 이 일화를 들려주면서 “영화는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헤밍웨이처럼 짧은 문장을 쓰는 작가도 있고, 제임스 조이스처럼 몇 페이지에 걸쳐 독백을 적어내리는 작가도 있는 것처럼. 파졸리니는 시적영화와 서사적 영화를 구분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영화는 시적 현상이 될 때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영화이건, 그건 내게 상관없다”고 말했다.

질문과 대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관객들은 상처받은 발칸반도의 역사와 그의 영화가 맺고 있는 관계, 유명한 롱테이크 촬영, 감독으로서 그의 믿음에 관한 질문들을 던졌다. 1996년 한국에서 개봉했던 탓인지 <안개 속의 풍경>에 관한 질문은 유독 많이 나왔다. 결혼하지 않은 채 한 여인과 25년 동안 살고 있는 앙겔로풀로스는 세 딸에게 들려주기 위해 <안개 속의 풍경>을 생각해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창문을 닦는 것처럼 손짓을 하자 자욱했던 안개가 걷힌다. 그리고 안개가 걷힌 풍경 끝에는 마치 태초의 생명인 것처럼 한그루 나무가 서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걸 말해 주고 싶었다. 너희가 손짓을 한다면, 너희는 세상을 창조할 수도 있다고”. 어린 남매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안개 속의 풍경>은 아이들을 달래 연기를 시켜야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힘든 영화이기도 했다. 열 한 살이었던 여자아이는 막 사춘기를 겪기 시작해서 조금만 혼나도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연기해야 하는 강간 장면이 있었다. 앙겔로풀로스는 어린 소녀와 함께 일했기 때문에 매우 섬세한 배려가 필요했다면서 이 장면을 생략한 이유도 덧붙였다. “스크린 밖에서 강간이 일어나면, 관객은 그 장면을 상상해야만 하고, 강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요즘 영화에 나오는 살인사건은 모두 평범한 느낌만을 준다. 그건 관객이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그 순간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앙겔로풀로스는 배우의 연기를 연출하는 또다른 예로 <율리시즈의 시선>을 들었다. 가방 40개와 개인비서, 트레이너, 심리치료사를 이끌고 촬영 장소에 온 하비 케이틀은 자신의 화를 돋군 앙겔로풀로스에게 “퍽 큐”라고 외치면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무표정하게 듣고만 있는 감독 때문에 결국 모든 기운을 소진한 채, 마지막 장면을 한 번만에 찍었다. 앙겔로풀로스는 “그는 <저수지의 개들>이랑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덩치가 무척 커서 사실 좀 무서웠다”고 말해 잠시 웃음을 주기도 했다.

20세기를 관통하는 3부작 영화를 찍고 있는 앙겔로풀로스는 자신은 쉽게 희망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그의 영화가 너무 절망적이라는 비난에 “영화를 만드는 일 자체가 긍정적인 행위”라고 답했다면서,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관객의 시선과 만나지 못한다면, 영화감독의 시선은 잃어버린 시선이 된다. 관객이 단 한명이든 백만명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감독은 타인의 시선과 만나야만 한다”는 말로, 앙겔로풀로스는 관객과의 만남을 정리했다. 긴 대화를 마친 앙겔로풀로스는 자리를 뜨기 전 T.S. 엘리어트의 시를 개작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본 시를 읽어주었고, 기립한 관객들로부터 존경어린 박수를 받았다.

글=김현정 사진=장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