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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추억 - 막노동 뒤 소주 한 잔
2004-10-12

부산영화제가 처음 열렸을 때 나는 <씨네21>의 기자였다. <씨네 21>은 당시로선 생소했던 영화제 데일리를 낼 참이었다.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영화제 개막을 몇 달 앞두고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씨네 21>을 찾아와 데일리 간행을 부탁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칸이나 베를린에서 발간되는 소식지 비슷한 것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영화제 측도, <씨네 21> 취재부도 만만하게 생각한 그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부산은 대한민국에서 처음 치러지는 국제영화제라는 흥분에 취해 역동적인 분위기로 달아올랐고 많은 사람들이 남포동에 모인 젊은 관이 인파를 보고 축제의 최면에 빠졌다. 사방은 즐거운 활기로 넘쳐나는 것같은데 <씨네 21> 데일리 사무실은 녹초상태였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숱한 시행착오의 아수라장 속에서 일 욕심 많은 당시 편집장의 진두지휘 아래 속으로는 육두문자를 삼키며 작업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또 달고 다녔던 것은 술이었다. 술은 마실 때나 마시지 않을 때나 늘 입가에 어른거렸다. 취했을 때는 물론이고 다음날 오후까지도 술 냄새는 몸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루의 일과를 끝낸 막노동자들처럼 알콜의 기운에 의지해 일의 피로를 견디는 습관이 영화제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오전에 사무실에 나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그날이 취재 아이템을 정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인터뷰를 하거나 취재거리를 긁어오면 저녁에는 기사작성을 한다. 편집 작업을 마칠 즈음인 새벽 1, 2시에는 서서히 목소리가 잠기는 것을 느낀다. 그때부터 일찍 끝난 기자들끼리 모여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면 하나 둘 씩 일을 마친 기자들이 그 자리에 합류하면서 새벽 5시를 넘기는 게 보통이다. 머릿속에 지푸라기를 쑤셔 넣은 것 같은 기분으로 다음날 기듯이 여관을 나오면 그날 일정이 시작됐다.

그땐 힘들었어도 굳이 힘들다고 말하긴 싫었다. 잔치의 곁에서 그걸 기록하는 자들에겐 그 잔치의 흥도 상당부분 감염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대낮에 나온 몽유병자의 걸음걸이로 다가가 접한 대다수의 영화인 손님들은 에너지뿐만 아니라 곧잘 감동도 전해줬던 것이다. 부산 영화제에서 데일리를 만든다는 것은, 영화를 본다는 것으로부터 거의 완전하게 소외되는 경험이면서, 동시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악수하고 대화를 나누며 때로는 친구가 되는 기막힌 나눔의 기쁨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이곳 부산에서 나는 기타노 다케시, 가린 누그로호, 허우 샤오시엔, 최양일, 장이머우 등의 감독들을 만나 한 수 배울 수 있었다. 회사를 옮기고 데일리를 만들지 않는 지금, 나는 부산에 오면 술을 별로 마시지 않는다. 술은 아무래도 격한 노동과 사람들과의 휴식같은 만남이 교차하는 그 몽롱한 생활의 와중에 마셔야 맛있다. 술이 입맛에서 달아나자 흥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늘 부산에는 오게 된다. 영화를 보기 힘든 건 여전하지만 이곳에선 여전히 익숙한 감독의 신작을 만나 우정을 확인하는 기쁨, 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영화의 감독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가 소주 한 잔 하면서 이 부산영화제를 통해 쌓는 추억의 두께일 것이다.

김영진(영화평론가, 전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