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BIFF Daily > 9회(2004) > 오늘의 영화제 소식
매년 내 간을 알콜에 담갔던 남포동 포장마차 여인
2004-10-11

나에게 영화제는 ‘간과의 전쟁’이다. 맛있는 집 많고, 아는 사람들 북적 대는 부산국제영화제는 더 그렇다(어제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는 부산영화제가 ‘박카스의 축제’라고 했다). 영화는 걸러도 술은 그러지 못하는 이 화상! 서울에서 맨날 먹는 술 부산와서 먹는다고 뭐가 다르다고…. 그런데 다르다. 어머니 고향이 부산이어서인지 부산 음식이 맛있기도 하지만, 부산에만 오면 내 간을 알콜에 담가놓게 만든 여인이 있다. 아니,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00년 가을이었다. 그해 부산영화제는 지금보다 추웠던 걸로 기억한다. 남포동 PIFF 광장 뒷골목을 로얄호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서울곰탕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 맞은 편에 그녀가 서 있었다. 밤 10시쯤. 속이 출출해지는 술시(酒時), 약간의 공복이 찬바람 맞아 한기로 변하고 있었다. 서있는 그녀를 마주보고 앉았다. “여기 따뜻한 쪽으로 오실랍니까? 아니면 의자 밑에 불 좀 넣어드릴까요?” 그녀는 내가 앉은 의자 밑으로 화덕을 넣어주었다. “뭘 좀 드릴까예? 오늘은 고등어가 좋습니다.”

왜 말이 없는데 마차라고 부르는 걸까. 서부영화에서 따온 건가. 포장마차는 이 정도 추울 때 술 맛을 살리는 데에 더 없이 적격이지만 나는 거기서 오래 술 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거기서 술 마시면 이야기의 밀도가 높아진다. 어느 순간까지는 그게 좋다. 그 순간이 넘으면 피곤해진다. 술 취해서 말 많이 하기 시작하면 십중팔구 누군가 한명이 웅변한다. 술을 즐기려면 이건 피해야한다. 오밀조밀 붙어 앉는 포장마차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숨 고를 틈을 잘 안 준다.

그녀의 포장마차는 달랐다. 안주 맛이 어떻게 그리 좋은지. 그녀는 고등어에 더해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생선들을 굽거나 튀겨서 내주었다. 그러면 안주 먹느라, 그 맛과 술이 어우러지는 미각미학적 쾌감을 음미하느라 열변을 토할 여지가 생기질 않았다. 자리가 좁다는 것도 여기선 장점이 됐다. 그 포장마차는 로얄호텔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포장마차 행렬의 맨 앞에 있었다. 영화제 기간 동안 아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그 앞을 지나간다. 반가운 이들도 있지만 피하고 싶은 이들도 있게 마련. 피하고 싶은 이들은 앉힐 자리가 없어서 좋고, 반가운 이들(특히 언니들)은 더 좁혀 앉으니까 좋았다.

그녀는 처음 나를 보고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머리 숱이 적은 내가 좋아할 호칭이 아니지만 머리 숱 적은 지도 오래 돼서 무뎌졌다. 중년에 많이 말랐지만 그녀의 얼굴은 예쁜 쪽이었다. 부산 사투리가 심했는데 그 억양의 높낮이 사이에서 친절함이 묻어나왔다. 묘사는 여기서 끝. 술집 주인에게 사심이 생기면 술 맛이 변질된다. 그해 영화제 기간 내내 그 포장마차로 출근했고, 술 맛은 변질되지 않았다. 서울 올라가기 이틀 전에 “내일 여기서 거하게 한잔 하고 올라가렵니다”라고 했고 다음 날 그녀가 준비한 각종 생선 구이와 탕의 향연은 내가 먹은 안주 중에 최고였다.

2001년에 왔을 땐 “사장님 안 오시나 기다렸는데”라고 했고, 2002년 영화제 중반쯤에 왔을 땐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예”라며 반겼다(호칭은 여전히 ‘사장님’이었다). 2003년엔 다른 일로 오질 못했고 올해는 해운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포동에 비하면 해운대는 정감이 가질 않는다. 아담한 술집이 안 보이고 포장마차 촌까지도 규격화됐다. 예전엔 영화제기간 중 공식 파티에 잘 가질 않았는데 올해는 거기 말고 갈 곳을 찾지 못해 여러번 갔다. 파티에선 마음 맞는 사람끼리 오붓하게 술먹기 힘들다. 그래서 술이 다음날까지 얹힌다. 내일 서울 가야 하는데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임범(<한겨레> 기자, 전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