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Enjoy TV > TV 가이드
우연이 만든 공동체
2001-06-21

로렌스 캐스단 감독의 <그랜드 캐년>

Grand Canyon 1991년,

감독 로렌스 캐스단 출연 케빈 클라인

<EBS> 6월24일(일) 낮 2시

로렌스 캐스단 감독에겐 불명예스런 딱지가 늘 붙어다닌다. 장르영화의 제조기라는 거다. 하지만 그에겐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재능이 있다. 로렌스

캐스단이 한때 <스타 워즈> 시리즈의 <제국의 역습>과 <인디아나 존스> 각본가였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이야기꾼의

재능을 입증하듯 감독은 다양한 장르영화를 시도했고 흥행에서 매번 괜찮은 성적을 거두곤 했다. 필름누아르 스타일을 차용한 <보디 히트>(1981),

현대판 서부극 <실버라도>(1985), 코미디물인 <바람둥이 길들이기>(1990), 그리고 로맨틱코미디인 <프렌치

키스>(1995)에 이르기까지 로렌스 캐스단은 여러 장르영화에 손댔다. 로렌스 캐스단에게 독창적인 스타일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장인적인 기질보다는 그때그때 관객 취향이나 유행의 흐름을 뒤따르는 예리한 눈썰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로렌스 캐스단

감독에게 불행한 일이라면 연출 데뷔작 <보디 히트>가 그에겐 ‘최고작’이기도 하다는 점. 비평적 관점으로 보건대 필름누아르의 현대적

변형을 시도한 <보디 히트>만한 수작을 이후의 필모그래피에서 발견할 수 없는 점은 아쉽다. 감독의 1991년작인 <그랜드 캐년>은

베를린영화제 수상작이다.

<그랜드 캐년>은 마치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1993) 예고편 같다. LA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인물모습을 하나씩

펼쳐보이므로. 변호사 맥은 흑인들이 사는 슬럼가에서 차가 고장나는 사고를 겪는다. 견인차를 끌고 나타난 흑인 사이먼이 우연히 맥을 돕는다.

둘은 금세 친해진다. 맥의 아내는 겉보기엔 평온한 가정의 주부지만 불안감을 가슴 한편에 지니고 산다. 영화 제작자인 데이비스는 폭력적인 B급영화를

만들곤 하는데 중요하게 여긴 장면이 필름에서 삭제되자 분개한다. 그런데 그는 불운하게도 총기사고를 당한다. <그랜드 캐년>엔 우연의

모티브가 연이어 중첩된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서 대도시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이 관계를 형성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 전개되고 있다.

양상이 그리 간단치는 않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은 하나같이 결핍감을 지닌 채 살아간다. 맥은 아내와의 성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의 아내는

가족들이 언젠가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하다. 사이먼은 딸이 있는데 귀머거리다. 영화제작자 데이비스는 총기사고 이후 자극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자신의 인생을 골똘히 되돌아본다. <그랜드 캐년>은 그리 심각한 드라마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조금 ‘확대된’ 가족드라마로서

무리없는 결말로 직행한다. 맥과 사이먼 등은 지진 같은 자연재해나 개인적 곤란을 경험하게 되지만 서로 의지하면서 헤쳐나간다.

<그랜드 캐년>은 사회 환부에 관한 통찰보다는 미국 중산층의 위기감과 그들의 연대의식을 경쾌한 에피소드로 꾸며내고 있다. 게다가

각각의 플롯이 매끈하게 해결되는 과정은 이 영화가 현대 미국사회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기도 한다.

<그랜드 캐년>에선 케빈 클라인 외에 스티브 마틴, 대니 글로버, 메리 맥도넬 등의 스타가 출연한다. 자신들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연기자들의 앙상블 연기는 <그랜드 캐년>이 지극히 할리우드적인 영화임을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베를린영화제가 이 영화에

금곰상까지 주면서 융숭하게 대접했던 이유가 궁금해진다. 김의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