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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저먼 시네마를 회고하는 독일영화 특별전
2004-10-09

독일 현대사의 그늘을 관찰하다

영화는 늘 직, 간접적으로 당대의 사회, 문화, 정치적 풍경을 담고 있지만, 양차 대전과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부채가 컸던 독일의 경우, 영화가 사회를 담는 그릇이 되는 일은 취향보다는 절체절명의 임무이자 부채이기도 했다. 1950년대 독일영화는 라인강의 기적 앞에서 오히려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철저히 외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TV의 등장으로 인해서 촉발된 영화산업의 급격한 몰락과 68혁명의 정신이 감도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출발한 '뉴 저먼 시네마'는 영화 속에서 특히 현실사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려고 애썼다. 어찌 보면 이것이 아무런 미학적 프로그램이나 영화적 입장도 공유하지 않고 있던 '뉴 저먼 시네마'의 유일한 구심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이번 회고전에 출품된 다양한 작품들의 유일한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뉴 저먼 시네마'의 모태가 되었던 '오버하우젠 선언'의 발기인이자 이후 독일 영화진흥제도의 입안에 있어서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알렉산더 클루게의 데뷔작인 <어제와의 고별>은 베니스영화제에서의 수상을 통해서 표현주의 영화 이후 국제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췄던 독일 영화의 존재를 다시금 각인 시킨 계기가 되었다.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온 여주인공이 냉정한 자본주의 사회인 서독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독일의 역사적 과거 뿐 아니라 낡은 아버지 세대 영화와의 결별을 꾀하는 젊은 독일 영화의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70년대 동독에서 제작된 하이너 카로프의 <파울과 파울라의 전설>은 일견 정치사회적 상황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이 남녀 관계의 굴곡에만 집중한 멜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집단의 가치와 규율을 강조하던 당시 동독의 상황 속에서 젊은 베르테르처럼 개인의 감정에 극단적으로 몰두하는 사랑은 그 자체로서 불온한 현실비판의 깃발이 된다.

알렉산더 클루게, 파스빈더, 슐렌도르프 등에 의해 공동제작된 연작 형식의 <독일의 가을>은 학생운동이라는 이상이 적군파라는 맹목의 폭력으로 변모해가고, 이로 인해 경직되어가는 서독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동독에서 망명한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하인리히 뵐 등 당시 서독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가담한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처형된 기업총수의 장례식과 감옥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테러리스트들의 장례식 장면을 대치시킴으로써 죽음으로 치닫는 당시 독일의 사회정치적 분열상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망가져가는 한 영화감독, 개인의 양심과 사회적 규율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식인, 모든 사람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하는 총체적인 감시망, 그리고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의 TV방영을 연기하는 방송위원들의 자기검열적인 모습 등을 통해서 독일이 서서히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얼어붙게 하는 동토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1986년 테러리스트들을 수용했던 감옥에 대한 다큐멘터리 <슈탐하임>으로 서독의 정신적 감옥화에 비판을 가했던 라인하르트 하우프에 의해서 연출된 <지하철 1호선>은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의 원작 격에 해당하는 독일 뮤지컬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이 영화는 “꿈의 기계”인 영화가 꿈을 꾸는 장르라고 일컬어지는, 가장 비현실적인 장르인 뮤지컬을 통해서 자본주의라는 초고속열차의 탑승에서 제외된 채 고작 지하철 주변에서 배회하고 있는 낙오자들의 삶의 애환을 담고 있다. 원작에서의 라이브 공연이 주는 강렬함이 스크린으로 옮겨지면서 많이 약해졌지만, 이 작품은 주류문화로 편입되면서 하류문화 특유의 도발과 파격을 상실해버린 록음악을 독일적 상황에 접합시킴으로써 록의 원형적 정신을 새로이 느끼게 한다.

90년대 이후 새로운 성장배경과 감성을 갖고 있는 신세대 감독들에 의해서 현실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라는 선언적 과제는 많이 퇴색했다. 하지만 악의 제국에서 냉전의 각축장을 넘어 분단과 재통일의 실험장에 와 있는 독일의 현대사는 아직까지도 그 길고도 짙은 그늘을 영화 속에 드리우고 있다. 이는 아마도 여전히 독일이 세계사와 인류에게 진 숙명적인 부채인지도 모른다.

남완석(우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