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BIFF Daily > 9회(2004) > 오늘의 영화제 소식
하나와 앨리스 보고 사랑을 배워야지
2004-10-09

해영해준의 뒤집어보기 엎어보기 (이하 글은 13세 이상 18세 이하 관람 가)

얘덜아, 이 ‘형 혹은 오빠, 것도 아님 아저씨’가 재수하던 시절 얘기를 잠깐 해볼라 그래. 종합반에 같이 다니던 어느 여자애를 알게 됐거든. 그 애는 예쁜 몸매는 아니었지만 목이 길고 빗장뼈가 멋지게 양 갈래로 뻗은 아이였어. 그 애는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오직 그 애만이 낼 수 있는 몸짓과 말투가 있었지. 그런 애한테 한번 반하면 그건 매력이 아니라 마력이 되는 거야. 마력.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이 ‘형 혹은 오빠, 것도 아님 아저씨’는 그 애와 말을 트게 되었어.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 유일하게 그 애와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 재수학원에서 비탈길로 3분을 내려오면 지하철역이 있었는데, 교회 장로인 그 애의 엄격한 아버지는 항상 그 곳에서 딸을 기다리다가 데려가곤 했었어. 그러니까, 그 애와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오직 3분. 그 3분 동안 무슨 얘기할까를 밤새 공부하다가 코피도 쏟고. 엄마는 그런 아들위해 보약 달이고..... 근데 그 3분은 항상 모자랐고, 모자라니까 버벅대고, 버벅대니까 더 모자라고.... 코피쏟고.... 보약먹고.... 당시 나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3분이었어. 딱 3분.

암튼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마지막 수업 날. 그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니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지. 그 날은 버벅대지 않았다. 3분도 짧지 않았어. 짧긴 커녕, 사라졌던 6개월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무척이나 길고 길었지. 근데.... 아무 말도 못했다. 차라리 버벅대더라도 아무 말이나 했어야했는데.... 결국 아무 말도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 ‘형 혹은 오빠, 것도 아님 아저씨’는 지금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얘덜아, 크면 알게 된다는 어른들의 말은 다 거짓말이야. 영어도 어릴 때 배워야 혀가 안 굳지? 사랑도 배워야 할 때가 있는데, 지금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이 ‘형 혹은 오빠, 것도 아님 아저씨’처럼 나중에 커서도 고생해. 진짜. 봐봐, 혀가 굳어서 키스도 잘 못하잖아. 자자, 순지 아저씨는 이 방면에 전문가야. 공부도 시청각 공부가 중요하잖아. 이 ‘형 혹은 오빠, 것도 아님 아저씨’는 오늘 <하나와 앨리스>를 볼까해. 늦깎이 공부라 쉽진 않다만. 어떠니? 놀면 뭐해? 한자라도 더 배워야지. 안 그래?

이해준(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