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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이 <69>면 주저하지 않으련다
2004-10-08

키스라는 것이, 애무라는 것이, 또 그 이상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던 89년, 우연히 만난 어느 여자 아이. 하얀 얼굴에 유난히도 눈이 검었던 그 아이는 예고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있었고, 바로 그 ‘예고에서 무용을 전공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항상 내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만나도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만남이 못되는 건 당연지사. 손이 안 된다면 그녀의 손톱이라도 한번 잡아 보는 게 소원이었던 그 ‘가슴 떨리게 시시한’ 만남은, 그러나 오래가진 못했다. 지금까지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그 어떤 이유로 그녀는 어느 날 휭, 떠났다. 아마도 손은 둘째치고 손톱조차도 잡아주지 않는 엉터리 같은 남자 때문이겠지. 시간은 흘렀다.

대학생이 된 나는 그 사이 그녀에 대한 얘기 몇 가지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몇 가지 얘기는 친구와 친구를 거치면서 더욱 과장되고, 정교해졌다. 남자를 만났고. 남자따라 가출을 했고. 남자따라 가출했으니 동거하고. 남자따라 가출하고 동거하니 학교를 그만뒀다는. 얘기는 결국 그녀가 약에 손을 댔다는 이야기로 정리되었다. ‘그녀가 따라갔다는 그 남자는 그녀의 손톱뿐만 아니라 손, 아니 어쩌면 팔까지도 잡아봤겠지...’ 그런 바보같은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어느 날 전화벨소리와 함께 그녀는 내게로 왔다. 다시 만난 그녀는 소문이 반쯤은 사실이고, 반쯤은 거짓일 것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얀 얼굴에 검은 눈은 여전했다, 내게는. 우리는 별 말없이 술을 마셨고. 그 날, 난생 처음 여관이란 곳에서 난생 처음 섹스란 것을 했다. 그리고 같은 날, 그녀는 내게 69체위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 되었다.

여전히. 그녀의 손은 둘째치고, 손톱조차도 잡아주지 못한 채. 몇 년 후. 무라카미류의 을 주저없이 집어 든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안다. 그 69가 그 69가 아닌 걸. 이유는 알 수 없다. 앞으로도 69년이든, 69세든, 69만원이든.... 제목이 69면 주저하지 않으련다. 따라서 역시. 전혀 주저함 없는 오늘의 선택은 무라카미류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상일 감독의 이다.

이해영(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