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니, 그건 너무 구하기 쉬워서 안 되겠다. 여러분이 헌책방에서 구한 마저리 앨링검의 절판된 추리소설을 기차에서 읽고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한창 미스터리가 무르익어갈 때 잠시 책을 의자에 놔두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돌아와서 보니 그 책이 사라지고 없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아직 수집해야 할 증거는 산더미 같고 범인도 궁금한데, 그 책의 나머지를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거예요.
오래 전에 저한테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 있었습니다. <`AFKN`>에서 하는 오토 플레밍거의 <로라>를 보고 있었지요. 아름다운 디자이너 로라가 얼굴에 총을 맞은 시체가 되어 누워 있고 우리의 맥퍼슨 형사가 차근차근 사건을 수사하던 중이었습니다. 용의자들이 하나하나 줄지어 등장하기 시작하고 결정적인 1차 반전(그게 뭐냐고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군요)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그만 정전이 되어버렸답니다.
1시간 뒤 다시 전기가 들어왔지만 이미 영화는 끝난 뒤였습니다. 못하는 영어로 간신히 분위기로 때려가며 사건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 모든 노력이 허사였던 거예요. 애꿎은 텔레비전에 주먹질을 해봐야 제 손만 아플 뿐이었지요.
물론 전에도 이런 식으로 끝을 놓친 영화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영화들은 <로라>처럼 추리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정체불명의 살인범을 뒤에 남겨놓지는 않았지요. 전에 끝을 못 본 <아반티!>라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사실 전 그 영화 끝이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텔레비전에서 해준다면 시간을 기억해서 잭 레먼 아빠 장례식에 어떤 소동이 일어났는지 한번 확인해보기는 하겠죠. 그러나 비디오를 사서 하나하나 확인할 생각은 없어요.
토막난 <로라>는 잊을 만하면 툭툭 튀어나와 저를 괴롭혔습니다. 한번 그 영화를 찾아 비디오 가게들을 뒤지기도 했어요. 모 비디오 가이드에 그 영화가 <라우라>라는 제목으로 나왔다는 정보를 읽었으니까요. 전 아직도 그 정보가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로라>일 수도 있고 이탈리아 에로영화인 <라우라>의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겠죠.
결국 <로라>는 제가 인터넷으로 구입한 최초의 비디오들 중 하나가 되었는데(물론 같은 주연배우가 등장하는 <유령과 뮤어 부인>도 자극제가 되었겠지만요) 결말을 확인할 때 기분이 정말 좋더군요. 십여년에 걸친 미스터리가 결국 풀린 셈이었으니까요. 물론 범인의 정체는 그렇게까지 놀라운 것은 아니었고 저 역시 어느 정도 짐작했던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로라>는 제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영화였고 그 영화의 진짜 알맹이는 그 얄미운 정전이 끊어먹은 후반부였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을 통해 최근에 재발굴된 이 영화의 원작인 베라 카스파리의 동명소설을 구입했습니다. 막 왈도 라이데커가 내레이터인 제1부를 읽기 시작하는 중이랍니다. 감회가 새로워요. 책 앞에 인쇄된 진 티어니의 사진을 손톱으로 툭툭 치기만 해도 추억이 방울방울 솟아오르는군요.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