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극장에 가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텔레비전뿐이었다. 그중에서도, ‘명절’은 절호의 기회였다. 아침저녁으로 영화 프로그램을 틀어주는 텔레비전은 일종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이었다. 물론 모두 다 좋은 영화는 아니었다. 아니 좋은 영화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쉽고 부족한 극장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비디오가 생겼지만, 그건 귀한 물건이었다. 나는 큰아버지집에 가야만 그걸 볼 수 있었고, 대개 그날은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이었다. 추석 때 빌려보지 못한 <쾌찬차>를 7개월이 지난 그 다음해 설날에 겨우 빌려보면서 명절이 3개월에 한번씩 있었으면 좋겠다는 어린 생각을 했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친척집에 가는 대신 친구들과 뭉쳐 동네 동시상영극장을 찾는 것이 명절 행사였다. 편집은 영사기사 아저씨의 전권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릴리아나 카바니의 <우편배달부>와 <천녀유혼>을 같이 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몇년이 더 훌쩍 지나서 진지하게 신문을 읽을 줄 아는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진짜’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생긴다는 기사를 봤다. 더 좋은 영화를, 더 많이 볼 수 있겠다고 무한정 기대했다. 그런데 도래한 세상은 같은 영화를, 그것도 상당수 무미건조한 영화를, 멀티하게 동시상영하는 요상함의 형태로 찾아왔다. 자본의 그늘을 이해하지 못했던 소년의 신천지는 오지 않았다.
올해 설날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실미도>를 본 것은 좋지 않은 경험이었다. 영화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극장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는 그 시스템의 강압에 다시 한번 놀랐다. 명절에 영화를 보러 나온 다섯 가구 중 한 가구가, 또는 5천만 중 1천만이 이 한편의 영화를 목매어 본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는 몇달이 지나 접한 또 하나의 허탈한 소식. 내년 2월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대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더이상의 상영계획이 없다고 한다. 적어도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곳은 상업 시스템에서 채워질 수 없는 교양의 장소이고, 학습의 공간이고, 세계와 영화 사이에 나를 근접시키는 성찰의 영역이다. 이제 볼 기회만이 아니라 생각할 여유까지 박탈당하는 느낌이다.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절날 온 가족이 나와 10개의 상영관에서 10개의 영화를 놓고 어느 것을 볼지 고민하는 즐거움이 필요하다. 한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연휴 중 하루를 버려도 썩 괜찮을 만한 장소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번 추석에도, 다음 설날에도, 그 다음 추석에도 여전히 독점적 상업주의에 선택을 강요당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별 다섯개짜리 명절이란, 보고 싶은 영화가 잔칫상의 음식처럼 푸짐하여 망설이는 그런 것이다. 그게 미래의 명절에 벌어질 풍경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쉽지 않다는 걸 알기때문에 더 절실하다고 느낀다.
정한석 mapping@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