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만났던 강정원과 김재수를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 나는 <임자 없는 나루배>의 제작을 부탁했다(1932년작. 이규환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으로 일제시대 ‘조선의 3대 명화’로 꼽혔다.- 필자). <임자 없는 나루배>의 주인공은 가난한 농부에서 도시 인력거꾼으로,
20여년이 지나 뱃사공 노인까지 변화하는 다양한 성격의 연기가 필요했다. 당시 쓸 만한 연기자는 윤봉춘(감독 겸 배우이자 나운규의 죽마고우.
이 난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필자)을 비롯하여 여럿 있었지만 나운규가 아니고서는 주인공 역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별안간
튀어들어온 신인감독이 당대의 일인자인 나운규를 출연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안 될 일이었지만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강정원의 도움으로 나운규와 극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그는 당시 멋쟁이들에게 유행하던 긴 머리에, 굴곡있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대본을 보여주며
주인공이 이러하니 우선 긴 머리를 확 깎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영화 연기의 5대 요소가 표정, 동작, 대사, 분장, 의상인데 그중에 하나만 빠져도
불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나를 보고 허허 웃으며 대본이나 보고 얘기하자던 나운규가 이튿날 오후에 다시 찾아왔다. 모자를 썼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보니 긴 머리가 없었다. 면도칼로 싹 민 것이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아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나형이야말로 한국영화역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길 분입니다.”
뒤에 그와 술을 한잔 하며 바리캉으로 깎아도 되는 것을 왜 면도칼로 싹 밀었느냐고 물었다. 나운규는 지금부터 촬영까지 한 20일 걸릴 것이니
그동안에 머리가 적당히 자랄 것 아니겠냐는 것이다. 연기에 대한 분석과 분장에 대한 계획까지 염두에 둔 일인자다운 행동이었다. 첫 작품은 감독
이규환의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주연 나운규의 정열, 이것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포지션은 감독의 권한, 앵글은 촬영기사의 세계”
촬영 첫날, 단성사 앞에서 인력거를 놓고 앉아 있는 나운규를 찍었다. 그때가 8월이었는데 덥기는 덥고, 구경꾼이 수백명 길을 메우고 있었다.
촬영은 이명우(최초의 촬영기사인 이필우의 동생- 필자)가 하였는데 그는 수틀리면 감독을 골탕먹였다. 양 팔꿈치를 카메라에 얹어 얼굴을 받치고는
감독을 흘겨보는 것이다. 이명우의 고약한 버릇은 첫날 첫컷부터 시작되었다. 감독은 작품 전체에 책임을 지면서 전체를 구상하는 입장이고 카메라맨은
앵글을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촬영은 다음 카메라 포지션과 인물의 움직임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수백명 관중 앞에서 감독을 눌러보려는 이명우의
고집이 계속되었다. 더이상 참지 못한 나는 콘티를 말아던지고 현장을 나와버렸다. 영화는 영혼으로 하는 것인데 권투시합같이 해서는 관둘 수밖에
없었다. 파고다공원 옆에 영화인들이 자주 모이는 ‘멕시코’ 다방에 앉아 있으니 나운규가 중재를 하러 왔다. 그는 허허 웃으며 “성미 참 고약하기도
하구만. 혹 가다 그럴 수도 있지 않겠소. 합시다” 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포지션은 감독의 권한, 앵글은 촬영기사의 세계라는
조건으로 타협을 했다. “이규환 고집 세다”는 말이 아마 이때부터 나온 모냥이다(기술적 숙련에 집중해야 했던 초창기 영화계에서는 기술을 책임지는
촬영기사가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논쟁을 통해서 이규환은 연출의 역할과 본질을 확인하고 주지시키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
촬영을 마치고 검열을 받으며 굉장한 곤욕을 치렀다. 그때 주요섭씨가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있었는데 시사평을 굉장히 총독부 비위에
거슬리게 썼다. “이 영화 전편에 흐르는 민족정신은 우리를 다시금 일깨워주고, 춘삼이의 혼에는 민족혼이 뛰놀고…” 이런 식이었다. 붙들려 들어가
무진 욕을 당하고 단성사 상영중에 필름을 재검열당했다. 라스트에 나운규가 도끼를 가지고 철로를 때려부수는 장면에서 약 200여컷을 가위질당했다.
<임자 없는 나루배> 원판은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다. 일본 흥행을 목적으로 스즈키 주기치(일본에서 영화를 배운 스승- 필자)에게
선전을 부탁했다. 호치신봉에서 시사를 한 뒤 해설판 발성영화를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원판을 그의 집에 둔 것이 분실하게 된 이유다. 당시로선
시비할 형편이 못 되어 책임 추궁을 할 수도 없었다.
흥행에 울고, 돈에 웃고
<임자 없는 나루배>를 끝내고 문예작품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안석영에게 시나리오를 부탁했다. 어부의 생활을 다룬 <바다야말하라>라는 작품인데(1935년작- 필자) 여기에는 제작자 김영식에 얽힌 가슴아픈 일화가 있다. 김영식에게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준 토지가
조금 있었다. 내가 제작을 부탁하니 흔쾌히 토지를 저당잡히고 돈을 대주었다. 작품을 완성하여 단성사에 개봉했으나 흥행 참패로 돈을 모두 날리고
말았다. 나 하나를 믿고 토지를 잡혀주었는데 동생들 데리고 완전히 굶어죽게 생긴 김영식을 생각하니 마음의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이래서 급한
대로 시나리오를 하나 썼는데 그것이 <이도령>이다(같은 해에 만들어진 <그 후의 이도령>을 줄여서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내게 한국영화사상
타작을 하나 골라내라면 먼저 뽑아낼 것이 <이도령>이다. 이 영화는 돈을 위해 만든 저속한 활동사진에 불과했다. 내 양심을 꺾고 울면서 이
작품을 만든 것은 토지를 찾아줘야 되겠다는 책임 때문이었다.
<이도령>을 위해 우선 <밝아가는 인생>(1933년작. 이규환의 두 번째 영화- 필자)의 촬영기사 후지이 기요시에게 촬영을
부탁하고 스즈키 주기치를 찾아갔다. 얘기를 하고 필름을 좀 대달라고 사정하였다. 둘이 수군수군하더니 녹음하다가 엔지난 사운드 필름이라도 사가지고
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석유통 다섯통에 토막토막 있는 이놈을 5원 주고 사와서 대구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암실도 없어서 촬영기사 후지이는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필름을 교체해야 했다.
참 슬픈 것은, 노인 역을 분장시켜야 하는데 수염 살 돈은 없고 해서 조감독에게 흰 개털 한 움큼을 잘라오라고 시켰다. 개 꽁무니를 한 30분
따라 댕기더니만 개털을 잘라가지고 왔다. 이 개털을 나무 붙이는 공업용 아교로 얼굴에 붙였다. 근데 나중에 수염을 떼려니 딱 붙어서 살점까지
떨어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알코올을 발라 내가 하나씩 하나씩 밤새도록 떼주었다.
고생 끝에 조선극장에서 개봉하였으나 흥행이 순조롭지 않아 고향인 대구 만년관에까지 붙이게 되었다. 조선극장 이외에는 영화를 걸지 않으려고 결심했는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고 나서 고향집 앞에서 울어버렸다. 근데 이게 시골 변두리 극장에서 오히려 수입이 괜찮았다. 천만다행으로 토지를 다시
찾아주게 된 것이다.
<무지개>, 감독 이규환의 ‘복수작’
<이도령> 이후 감독 이규환으로서 복수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만든 것이 <무지개>다. 자금 능력이 없어서 일본인 가운데 투자할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후지이한테 편지를 하였다. 조건은 일본이 필름·카메라·현상을, 우리가 시나리오·감독·연기·로케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흥행권도 일본 투자자가 일본쪽을 갖고 조선은 우리가 갖는 것으로 하였다. 그래서 후카가와 히라시(일본 닛카쓰영화사 감독 출신- 필자)가 투자자로
나섰는데 이놈이 원래 양말을 아침에 갈아 신고 저녁에 갈아 신고 하는 사치스런 난봉꾼이다. 하루는 <무지개>(1935년작- 필자)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는 김소영을 호텔로 보내라고 했다. 김소영은 조선의 연기자인데 호텔로 오라 가라 하는 것은 기생으로 대하는 수작이었다. 이쪽 영화인들에
대해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차라리 합작을 안 하겠다고 했더니 그 자식이 가만히 있었다. 하마터면 따귀를 갈길 뻔했다.
촬영을 마치고 일본에 건너가 여관을 잡아 편집을 하는데 후카가와가 들락날락하며 공작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절대로 원판만은 넘겨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필름을 도둑맞았다. 안 되겠다 싶어 밤을 꼬박 새워 검열 대본을 써서 이튿날 일본 내무성 영화검열계에 검열을
신청했다. 후카가와가 원판을 가지고 갔으니 나도 일본 흥행권을 주지 않을 작정으로 검열을 선수친 것이었다.
검열을 마치고 성동호(변사 겸 제작자. 이 난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필자)가 변사로 있는 조선극장에서 개봉을 했다. 당시 일주일을 상영할
정도면 성적이 꽤 좋은 편이다. 특히 호남 일대에서 반응이 좋았다. 그뒤 후카가와와 얽힌 원판에 관한 기막힌 이야기는 다음 작품 <나그네>(1937년작-
필자)의 검열에서 다시 이어진다.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정리 안선주/ 중앙대 영화과·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babtong8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