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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6>
2004-10-06

홍콩 차이나/ 2004년/ 감독 왕가위/ 오후 7시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상영장

오래 전 앙코르와트 사원 석벽에 사랑의 비밀을 봉인한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아름답고 안쓰럽고, 그래서 궁금했던 그 남자 차우가 돌아왔다. 그는 변했고, 변하지 않았다.

오리엔탈 호텔 2046호를 맴돌며 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차우(양조위)에겐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2046호에 머무는 매력적인 여인 바이 링(장쯔이)과 뜨거운 사이로 발전하지만, ‘마음’을 주지는 않는다. 일본 애인과의 사랑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호텔 사장의 딸 왕징웬(왕페이)과 연애와 소설에 대해 많은 공감을 나눈다. 싱가폴에서는 프로 도박사(공리)와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그녀는 과거의 그늘에 묻혀 지낼 뿐이다. 자의건 타의건 둘 다이건, 차우는 ’다시’ 사랑하지 못한다. 그는 여자에게 “과거에서 벗어나면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하지만, 그건 그 자신을 향한 애원이자 탄식이다. 미래라고 생각하고 쓴 소설 도 결국은 그의 과거 이야기다.

은 <화양연화>의 연작이지만, <화양연화>를 닮지는 않았다. 시간의 경과를 강박적으로 보고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반복하는 이 영화는 느림과 절제의 미학을 선보였던 <화양연화>와는 정반대로 달려간다. <화양연화>가 은밀하고 함축적인 ‘시’였다면, 은 과시적이고 비장한 ‘오페라’다. 미술감독 장숙평은 문화혁명기 홍콩과 2046이라는 미지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찔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는가 하면, 불안과 열정, 허무와 고통의 정서까지 포착한다.

양조위, 장쯔이, 공리, 기무라 다쿠야 등 아시아 최고의 스타들이 포진한 캐스팅은 그 자체로 황홀한 스펙터클이다. 홍콩의 중국 반환 50년째가 되는 2046년이라는‘시점’, 그 ‘유통기한’까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가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은 홍콩 반환이라는 예정된 소멸의 시간으로 치달았던 왕가위의 90년대 영화들과 더 닮아 있다. 은 <화양연화>의 후일담이면서, 왕가위 전작들의 집대성이다. 왕가위는 에서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 과거와 함께 살아야 하는 남자의 초상을 공들여 보여준다. 그건 과거에 집착해서도 과거를 부정하거나 망각해서도 안된다는, 왕가위 스스로의 다짐 같아 보인다. 그의 오랜 테마, 사랑과 시간에 대한 성찰, 홍콩에 대한 애정어린 향수는 에 이르러, 가장 화려한 꽃으로 만개했다.

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