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잘못 먹었는지, 최근 한나라당 의원들이 재미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젊은 의원들이 전당대회에서 록을 연주하고, 어느 중진 의원은 영화판에 명함을 내밀더니, 이번엔 그 당 의원들이 결성한 극단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극단 ‘여의도’의 <환생경제>. 단 하루의 공연으로 신문, 잡지, 방송 등 매스컴을 일거에 장악해버렸다.
무서운 실력이다. 하지만 뜨거운 반향에 비해 정작 작품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차갑기 그지없다. 이 극단을 일관되게 지원해온 보수신문마저 이 작품이 “저급하다”고 불쾌감을 표명했다. 이렇게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만이 “프로를 방불케 하는 연기였다”고 호평을 남겼다.
왜 이토록 격렬히 반발하는가? “육××놈”, “개×놈” 등 몇 가지 대사 때문이란다. 대중이란 이렇게 단순한 존재다. 이 천박함에 비해 한나라당의 “문화적 자세”는 얼마나 세련되었는가. “내용은 도외시한 채 아주 부분적인 대사 몇개를 빌미로 연극 전체를 문제삼는 것은 올바른 문화적 자세가 아니다.”(임태희 대변인)
이 사회의 취향은 아직 ‘고전적’이다. 고전주의는 예술에 점잖음(비앙세앙스)을 요구한다. 작품에서 저급한 욕설과 외설적 표현은 모조리 배제하려 한다. 하지만 현대예술은 다르다. 전위예술은 이런 유의 거추장스런 금기를 사정없이 파괴하려 한다. “근애, 너 이혼하고 위자료로 그거나 떼달라 그래.”(박순자 의원) “그놈은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이야.”(송영선 의원)
단순한 눈에는 욕설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이라면 “그거” 혹은 “거시기”가 프로이트가 말한 ‘에스’(Es)와 일치하는 데에 주목할 것이다. 그렇다. 친구 남편의 “거시기”에 집착하는 저 두 여인의 편집증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된 여성의 성욕을 읽어야 한다. “위자료”로 얻고 싶은 “거시기”. 여기서 우리는 이 두 여인의 머리 위에 드리운 거대한 남근중심주의의 그림자를 읽어야 한다. 게다가 작품의 바탕에 깔린 포스트모더니티. 고도로 농축된 예술성을 가진 문제의 대사. 재미있게도 그 대사에는 주인이 없다. 배우들은 원래 대본에 있던 것을 연기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반면, 대본을 쓴 작가는 그게 배우들의 애드리브였노라고 양보한다. 그 대사는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쓴 사람은 없는데, 텍스트는 존재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작가의 죽음’이다.
한편, 극적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었다. 연극이라면 최소한 “앞뒤가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황의 설정에 합리성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고전극의 전통. 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원리가 아직도 대중의 취향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 취향에서 보면 <환생경제>의 상황설정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극은 다르다. 오늘날 연극은 의도적으로 불합리해져, 이성적 머리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이른바 ‘부조리극’이 되려 한다. 연극은 왜 부조리해지려고 하는가? 사회 자체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연극은 스스로 부조리해짐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정직하게 증언하려 한다. 그럼, <환생경제>는 왜 부조리한가? 당연히 한나라당 자체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격식파괴와 의미파괴. 이것이 고전예술과는 다른 현대예술의 코드. 이게 이해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극단 ‘여의도’, 실망할 것 없다. 예술의 길은 험난하고, 전위의 길은 외로운 것이다. 다음에 또다시 문제작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면, 그럼 총선에서 줄줄이 낙선해 전업 배우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