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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文字) 바이러스
안규철(미술가) 2004-08-27

영상의 시대가 왔다고 해서, 문자의 시대가 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상의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여전히 문자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저 문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된다. 형형색색의 간판과 현수막과 표지판과 스티커에 담겨진 문자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도시가 밤낮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건물의 전면은 말할 것도 없고 전봇대, 고가도로의 교각과 같이 별볼일 없는 여백마저도, 비워두는 것이 마치 부도덕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대리운전이니 전화데이트니 베트남처녀결혼이니 하는 광고문구로 도배가 되어 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우리가 발을 들여놓는 곳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지켜야 할 것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알려주는 문자 정보의 드넓은 바다인 것이다. 웬만큼 단련이 되지 않으면 그 속에서 표류하다가 익사할 수도 있는 바다.

이 소란스런 문자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 잠시 산과 바다로 떠난다 해도 사정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그곳은 그곳대로 이미 극성맞은 문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뼈다귀해장국, 생고기, 닭갈비, 소머리국밥, 땅 땅 땅, 사망사고 발생장소 따위의 단어들이 어디서나 우리에게 달려들고, 모국어로 가능한 모든 문학적 상상력이 동원된 식당과 모텔과 부동산 중개업소의 이름들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도시를 벗어나서 자연에 가깝다고 알려진 장소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곳에서 우리가 만나야 하는 것은 오히려 더 강도가 높아지는 문자의 집중포화이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가는 여행객들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 이곳의 문자들은 한층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다. 휴가지는 가까스로 짬을 내어 도시를 떠나온 가련한 뜨내기들에게 먹을 곳과 잠잘 곳을 알려주기 위해, 그들이 떠나온 곳보다 더 극심한 문자 과밀지구가 되어 있다.

도시 미관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망가진 시각 환경을 개선하려고 전문가들이 만드는 모범적인 간판 디자인을 보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의의 노력이 눈에 띌 만한 성과를 얻을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우선 그것이 유해물질에 의한 환경오염 문제처럼 당장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간판이 만들어낸 ‘문자의 바다’에 빠져죽은 사람은 아직 보고된 바 없으며, 이 바이러스의 해독(害毒)은 그저 눈이 좀 피곤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기가 부끄러울 뿐이지 시스템을 마비시킬 정도는 아니다. 민생(民生)이 지상과제인데 이 정도는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 디자인의 문제, 미적 취향과 감각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계몽이나 규제를 통해서 간판업자들과 업주들의 디자인과 언어 감각을 순화시키거나 세련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간판을 읽는 ‘독자’ 즉 시민의 삶의 양상이 달라지지 않는 한 상황이 바뀌기는 어렵다. 모양과 구조가 똑같고 평수만 다른 아파트를 수없이 이사다니는 지금의 삶,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전혀 새롭지 않은 새로운 도시가 끊임없이 개발되는 대한민국의 삶이 이런 간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집들이 헐리고 산이 깎이고 풍경은 낯설어진다. 장소와 기억이 연결되지 않는다. 그때그때 정보가 제공되지 않으면 우리는 당장 어디로 가서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디에 몸을 눕히고 잠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사물에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과 설명이 동어반복적으로 붙여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휴가지에 가서 현지 간판업자의 조악한 디자인 감각을 탓할 일이 아니다. 전 국토를 오염시키는 문자 바이러스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글·드로잉 안규철/ 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