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대한민국 간판

“헌법을 지키지 못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간판을 내려야 한다.” 한나라당서 대표 노릇하시는 분의 말씀이다. 그러잖아도 무더위로 짜증나는데, 이분의 고온 다습한 발언이 불쾌지수를 더욱더 끌어올린다. 국가의 “정체성”을 걸고 “전면전”을 불사하겠단다. 툭하면 경제가 어려우니 파업도 하지 말라고 하던 분들이 “경제위기” 운운하며 하는 애국질이 기껏 국가를 내전 상태로 몰고 가겠다는 협박이다.

정국운영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자신의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겠다는 속셈이리라. 근데 웬 “정체성” 타령? 그동안 몇 가지 사건이 있긴 했다. 가령 전향을 거부하다 사망한 남파간첩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한 것, 의문사위의 조사관 중 조직사건 연루자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 최근 NLL에서 벌어진 사건과 관련해 군 내부의 불만이 드러난 것 등. 모두 대한민국 우익 성기들을 ‘빠딱’ 서게 할 만한 사안이다. 과민한 놈들은 벌써 질펀하게 일을 마치고 껄떡대고 있다.

하지만 먹고살기에 바쁜 대부분의 시민들은 성 취향이 달라 이런 이념적 문제를 놓고 발끈하지 않는다. 이른바 “경제위기” 속에서 박근혜씨가 혼신의 힘으로 연출하고 계신 저 애국적 발기의 숭고한 뜻을 이해해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이념만으로 발끈하는 변태들과 달리 일반 시민들은 경제문제가 걸려야 비로소 진지하게 발끈한다. 그리하여 우리 박 대표, 부랴부랴 억지로 논리를 하나 지어냈다.

(1)“간첩이 민주인사로 둔갑하고 간첩이 군장성을 조사하는 일이 있다.” (2)“국가이념이나 체제, 경제를 어떻게 운영하느냐 문제 등이 다 헌법에 들어 있다.” (3)“거기에 대해 국민이 불안해하면 경제도 생물과 같아서 움츠러들고 움직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간첩이 민주인사로 둔갑하다보니 사회가 불안해져 경제가 안 풀린다는 것. 이 맹구 같은 소리가 제1야당 대표라는 분의 현실인식 수준이다.

명색이 보수당의 당수로서 “간첩이 민주인사로 둔갑”하는 세태를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또 명색이 재벌당의 당수로서 현정권의 시장(=재벌)에 대한 불신을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해 못 할 것 없다. 하지만 간첩이 민주인사로 둔갑하는 사태 따위를 어찌 남로당 군책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사태에 비하리오. 게다가 시장 원리 우습게 알기로는 공권력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남의 신성한 사적 소유를 강탈하신 아버님 따를 분이 어디에 있겠느뇨.

오늘날 박 대표를 그 자리에 서게 해주신 분이 어떤 분이셨던가? 일제시대에는 관동군 소위가 되어 ‘민족’을 배반하고, 해방 뒤에는 남로당의 군책이 되어 ‘국가’를 배신하고, 전쟁 뒤에는 쿠데타로 헌정을 파괴하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유신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했던 분이다. ‘민족’을 배반하고, ‘국가’를 배신하고, ‘헌정’을 파괴하고, ‘체제’를 부정한 이의 후광을 업은 분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국가 정체성에 시비를 걸 주제가 못 된다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 간판”이 어디 박근혜씨 말 한마디로 떼었다 달았다 할 수 있는 것이던가? 그 간판이 얼마나 육중하냐 하면, 관동군을 하다가 남로당을 했던 자가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에 올라 까놓고 파쇼질을 했을 때도 떼내지 못했던, 그런 간판이다. 싸가지 좀 봐라. 자기가 뭔데 감히 이 나라의 간판을 떼었다 달았다 한단 말인가? 이 정도면 완전 공주병 말기 증상이다.

더운 여름날 괜한 짓으로 국민들 열받게 하지 말고, 박 대표도 저기 열대의 무인도로 피서나 가셨으면 좋겠다. 간판이 그렇게 탐나? 그럼 한나라당 간판 떼어가면 될 거 아닌가. 한나라당이야말로 최대의 시장 불안 요인. 한나라당 간판만 떨어지면, 나라 경제가 저절로 일어선다. 툭하면 “이민 간다”던 그 인간들도 제발 데려가시라. 모기약하고, 아, 문래동의 아버님 흉상도 잊지 마시기를….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