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랑이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연출 제의를 물리치고 <거미단>을 만든 것은 흥미로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프리츠 랑은 루이 푀이야드의 연작 범죄물과 이국적 취향의 모험물에서 영향을 받은 <거미단>을 만들면서 미래를 감지할 수 있었다. 프리츠 랑은 변장과 최면과 술수에 능한 마부제 박사와 일당의 범죄행각과 몰락을 그린 <도박사 마부제 박사>를 통해 범죄의 세기인 20세기와 범죄 연대기의 대중적 이용을 예언했던 것이다. 유작 <마부제 박사의 천 개의 눈>까지 이어진 ‘마부제 박사 시리즈’의 시작인 <도박사 마부제 박사>는 독일의 당시 상황을 반영한 표현주의 너머의 세계에 이미 도착했던 작품이다(그래도 첫 번째 표현주의 작품의 연출을 놓친 게 못내 아쉬웠던 것일까? 프리츠 랑은 <도박사 마부제 박사>에서 ‘표현주의는 주변에 넘쳐나는 수많은 오락거리 중 하나일 뿐’이란 말로 자위했다).
미국의 이미지사와 영국의 유레카사는 무성영화의 DVD 작업으로 유명한데,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유레카사가 최근 빼어난 수준의 무성영화 DVD를 연이어 출시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도박사 마부제 박사>의 경우, 유레카판은 독일 필름 보관소와 무르나우 재단이 독일과 해외 상영판의 카메라 네가 필름을 비교해가면서 복원한 완전판을 수록해놓았다. 두 판본은 편집과 화면구도에서 차이를 보이나 기본적인 줄거리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유레카판의 섬세하고 또렷한 영상은 비교를 불허하게 만들며, 이미지판의 고전적이고 우아한 음악에 비해 알소샤 짐머만이 만든 유레카판의 음악 또한 극적 긴장감과 생동감이 넘친다. 그 외 이미지판엔 음성 해설이, 유레카판엔 다양한 부가 영상이 지원된다.
여기서 DVD란 물체에 담긴 복원물을 다시 생각해본다. 필름과 스크린이란 물체 속에서 움직이는 건 존재했던 사람의 동작일 테지만, 누군가에겐 이미 사라진 순간 속에서 힘겹게 숨쉬는 유령의 몸짓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유령의 몸짓을 불멸의 무엇으로 만들고자 하는 복원 담당자에게 혹시 질문하고 싶을지 모른다. ‘필름 속의 유령이 피곤해 보이지 않아요? 이제 그만 그 자리에서 쉬게 해주세요’라고. 영화 100년의 시간을 지나 복원의 열정에 빠진 시대, 바보 같은 자에게 언뜻 떠오른 생각이었다.
이용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