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여름이었을 거다. 대학로를 지나는데 견공들의 고통받는 사진을 걸어놓고 서명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늙은 여배우로 인해 또 다시 국제적 ‘망신거리’가 된 보신탕을 비난하면서 개고기를 불법화하는 법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지나가던 나에게 두 사람이 다가와 찌라시를 주면서 서명을 하라고 한다. 미안하게도 나는 갑자기 화가 난 어조로 되물었다. “아니, 왜 개고기만 먹지 말자는 거죠? 소, 돼지, 닭은 대체 무슨 죄가 있길래 그렇게들 먹어대는 거죠? 소나 돼지는 먹어도 되고 개는 먹어선 안되는 이유가 뭐죠?”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예전에도 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흔히 하듯 야만적이란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거꾸로 “인간의 친구인 개를 먹는다”는 이유로 한국인을 비난하는 바르도나 서구인들의 소식을 들으면 차라리 먹어줄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먹지 않았던 것은 특별히 보양식을 찾아먹는데 별 관심이 없었던 데다, 사먹을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보신탕이나 개에 대한 내 태도는 어쩌면 이중적인 것 같다. 한편에선, 정력에 좋다는 걸 찾아다니는 인간에 대한 혐오의 감정만큼이나 그런 이유로 여름이면 애처롭게 죽어가는 개들에 대한 일종의 연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것은 어떤 동물은 ‘인간의 친구’고 어떤 동물은 ‘인간의 먹이’라고 정해두곤, 먹이 아닌 친구를 먹는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사람들에 대해 갖게 되는 분노와 경멸의 감정이다. 개는 인간의 친구가 되기 위해 태어나고, 소는 인간의 먹이가 되기 위해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심지어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의 먹이가 되기 위해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생각해봤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인간에게 고기를 주기 위해 산다는 저 끔찍한 사육의 역설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이후 사육되는 동물의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살면서 서로 먹고 먹히는 일이야 동물들로선 피할 순 없는 운명일 거다.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 것처럼, 살다가 다른 동물에 잡아먹히는 것 또한 삶의 순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동물에게 자신의 살을 주기 위해 사육되고, 다른 동물을 위해 죽기 위해 산다는 것은 삶 자체에 대한 모욕처럼 보인다. 그런 삶은 삶의 양상도 모욕적인 것으로 만든다.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저 서서 사료를 먹으며 고기를 불려가는 삶. 그리고 편하게 그 고기를 먹어대면서 인간 또한 점점 움직이지 않게 되었고 자신의 살을 불려가고 있다. 사육동물의 사후복수?
그런데 먹이가 되기 위한 삶보다 좀더 끔찍한 종류의 삶이, 삶에 대한 모욕이 있음이 길 건너편의 의대건물을 보면서 생각났다. 실험동물들의 삶. 인간은 암을 피하기 위해 쥐의 몸에다 암세포를 주입한다. 인간은 자신의 피부에 바를 화장품이 얼마나 안전한가를 알기 위해 토끼의 털을 깎곤 어이없는 맨 살에 문제가 생길 때까지 화학약품을 바른다. 인간은 자신이 먹는 라면이 얼마나 유해한가를 알기위해 쥐들이 죽을 때까지 라면만 먹인다. 게다가 실험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살을 찢고 내장을 가르는 짓을 마취도 없이 한다.
어떻게 하면 죽는가를 인간에게 알려주기 위해 사는 실험동물의 삶. 그것은 삶을 하나의 실험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남이 먹이는 음식, 남이 쑤셔놓는 주사바늘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실험이란 점에서 결코 자신의 삶이 될 수 없는 실험이고, 결코 자신의 삶이 아닌 삶이다. 마치 남의 꿈 속에 있는 앨리스처럼, 그래서 그의 꿈이 끝나면 죽듯이 사라져야 하는 그런 삶의 역설(그가 깨면 나는 죽는다!). 이 끔찍한 역설 속에서 매년에 약 6억 마리의 동물이, 한국에서만 약 4백만 마리의 동물이 죽어간다.
이 거대한 비극과 불행들에 비추어보면, 자신이 아끼는 애완동물에 대한 인간의 동정과 연민이란 얼마나 초라하고 왜소한 것인지! 그리고 그 동정과 연민조차도 얼마나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것인지! 동물들을 친구, 먹이, 실험도구 등으로 나누어 그들의 존재이유를 자신이 할당할 수 있다는, 그 동정심의 전제는 또 얼마나 교만하고 독단적인 것인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내가 그런 종족의 일부임이 부끄러워진다.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