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는 지금도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 그 시간에 영화 한편 더 보거나, 그도 아니라면 술 한잔 더 하는 것이 인생에 이롭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어차피 스스로 설득하고 납득할 시간의 여유도 없이 일어나버린 욕망의 지각변동을, 그리고 이미 뱉어버린 방심의 고백을 어떻게 다시 주워담을 것인가? 정씨는 <발리에서 생긴 일>(극본 김기호, 연출 최문석)의 첫회부터 마지막회까지 단 한회도 빼놓지 않고 기계적으로 보았고, 같은 방송사의 제작진이 기획 제작하여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파리의 연인>(극본 김은숙·강은정, 연출 신우철·손정현)이 <발리에서 생긴 일>의 뒤집힌 손바닥 같은 이데올로기와 환상을 전파한다고 간파했으면서도 그 유사한 기획력에 끌려 여전히 주말이 되면 텔레비전 앞을 서성인다. 이 모든 것이 <발리에서 생긴 일>을 보다가 생긴 일이다.
정씨는 왜 <발리에서 생긴 일>에 끌려 <파리의 연인>까지 훔쳐보는지 스스로에게 그 점을 해명하고 싶어진다. 평소에 잘 보지 않던 자신까지 홀릴 정도면 거기엔 뭔가 있을 거라고 자뻑 비슷한 자평을 한다. 사실 정씨는 자기 혼자 <파리의 연인>을 본다고 착각했었다. 그런데 웬걸. <파리의 연인>은 방영 8회 만에 43.7%의 시청률을 기록(닐슨 미디어리서치 집계)했고, 10회째에는 시청률 46.1%(전국기준 TNS집계)를 넘어섰고, 지난 5년간 방영된 드라마 중 시청률 40%에 가장 일찍 도달한 드라마라는 집계도 나오고 있다. 남자주인공 박신양이 타고 다니는 고급 승용차의 차종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그가 매고 나오는 넓은 넥타이는 갑자기 값이 치솟고 있다. 갑자기 정씨는 <발리에서 생긴 일> 종영 직후 여행 사이트에서 세부, 방콕, 파타야 등등등 다른 곳은 다 놔두고 발리만 온통 예약 매진됐던 걸 본 기억이 난다. “그람시가 뭐예요?” 마치 음식 이름 물어보듯, 극중에서 하지원이 묻자마자 먼지 속에 깔려 있던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가 평소의 6배에 달하는 판매율을 보였다는 기사도 떠오른다. 모르긴 해도 요즘 파리행 티켓은 연인들의 보물찾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정씨는 <발리에서 생긴 일>과 <파리의 연인>의 캐릭터 구성 및 스토리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선녀, 그녀를 둘러싸고 애정의 줄다리기를 벌이는 두명의 남자, 그 두명의 남자 중 하나를 차지하려는 악녀가 이 두 드라마의 기본 스토리이다. <발리에서 생긴 일>은 이수정(하지원)-강인욱(소지섭)-정재민(조인성)-최영주(박예진)의 관계로 끌어갔고, <파리의 연인>은 강태영(김정은)-한기주(박신양)-윤수혁(이동건)-문윤아(오주은)로 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발리에서 생긴 일>과 <파리의 연인>에는 차이가 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이 마지막회에 이르러 예고했던 비극적 결말을 끝내 실천하면서 시청률 40%를 겨우 넘어섰던 것에 비해 <파리의 연인>은 이미 초반부터 그 수치를 뛰어넘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좋게 표현하면, <파리의 연인>이 훨씬 대중적인 소구력이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포장된 판타지 세계로의 중독성이 훨씬 더 강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 정씨는 약간의 사견이 있지만, 이런 경우 제일 좋은 건 제작진을 먼저 만나보는 거다. 사견은 그 다음에 얘기해도 된다. 정씨는 두 드라마 모두를 기획한 SBS 특별기획팀의 김양 프로듀서를 만났다(괄호 안은 정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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