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경우 르네상스 시대부터 도시에 대한 이상적인 형상을 꿈꿔왔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원형 내지 정방형의 도형 안에 번듯하게 뻗은 네 갈래 길, 그리고 방사상의 도로들. 그러나 이 가운데 실제로 만들어진 건 별로 없다. 그저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꿈꾸었을 뿐이다.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절대군주’들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자신이 통치하는 도시를 자신의 그 절대적 위치를 가시화하는 형상대로 만들고자 했다. 화려하고 거대한 궁전, 그걸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도로들을 만들었다. 베르사유, 파리, 비엔나, 포츠담 등등. 그 시대는 교황조차 비슷한 꿈을 자신이 사는 도시에 투영하고자 하던 시대였다. 포폴로 광장에 세개의 간선도로를 모으고, 그 중심에는 궁전 대신 오벨리스크를 세워두었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도시 로마가 잘 보여주듯이, 이미 존재하던, 새로운 이상과는 거리가 먼 구불구불한 도로와 제멋대로 늘어선 낡은 집들을 제거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래서 기하학적 꿈이 작도한 도시의 형상과 오래된 잔존물들인 실재가 뒤섞이며 공존하는 혼합물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서울이 그렇다. 근대의 도시계획은 언제나 이 ‘불편한’ 공존의 틈새에서 시작된다. 오스망의 경우처럼 왕권을 업고서 아예 오래된 도로와 건물을 부수고 곧게 뻗은 길을 내어 이상적 형상에 따라 도시 전체를 개조한 경우는 차라리 예외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곧게 뻗은 길과 깔끔한 스카이라인을 기본 구도로 삼는 시각적 형상이 도시의 모습을 형성한 틀을 제공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대적 도시계획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던 것은 도시 안에서 다양한 흐름들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려는 그런 꿈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흐름, 자동차의 흐름, 상품의 흐름이 아무 데로나 흘러가지 못하도록 홈을 판다. 마치 물의 흐름을 통제해서 이용하려는 수로들처럼 도로를 만든다. 그리고 도로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양상에 맞추어 이런저런 종류의 건물들이 배치된다. 그리고 그 도로를 따라 흘러가는 사람이나 자동차 등의 흐름을 관리한다. 수학적 감옥 <큐브>에 스스로 갇히고자 했던 건축가가, 함께 갇힌, 권력자이길 원하는 경찰관에게 하는 말은 이런 양상을 아주 잘 보여준다. “우리가 도시를 만들면 너희는 순찰을 돌지.” 그런 도시 안에 우리가 산다.
그러나 <올드보이>의 턱없는 전능성을 젖혀둔다면, 계획대로만 되는 일이 대체 어디 있던가? 언제나 예측불가능한 사태가 발생하고 없었어야 할 사고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획과는 달리 홈통 같은 도로들이 막혀 흐름이 차단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물론 경찰이나 관리자들이 달려가지만 도시의 용량이 증가함에 따라 막힘이나 범람, 누수에 비교될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 이 경우 도시계획자나 관리자들은 흔히 새로운 도로를 만들고 홈 같은 도로 안에 다시 새로운 홈을 파서 흐름을 세분하고 동질화해서 목적에 따른 합리적 통제가능성을 높이는 식으로 대처한다.
하지만 세밀한 기계를 사용해야 하는 사람들은 잘 안다. 흐름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이 세밀하고 정교할수록 예상 밖의 사태에 대한 대응능력은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을. 슈퍼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게 하려면 온도와 습도는 물론 먼지 같은 주변조건을 지극히 세심하게 유지하는 또 다른 ‘고도의’ 섬세한 조건이 필요하듯이. 여기선 약간의 예측못한 일들이나 약간의 범람, 혹은 사소한 실수만 일어나도 거대한 사고나 고장이 발생하기 십상이다.
중요한 것은 막힘이나 범람, 혹은 예측 못한 사태는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을 질병으로 간주하고 통제력을 확장해서 제거하려는 시도는 더욱더 조그만 이탈에도 민감하게 대형사고를 일으키는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막혔을 때 빠져나갈 샛길들을 열어두고 막힘이 커지기 전에 범람할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을 남겨두는 게 훨씬 더 낫다. 대대적인 교통혁명을 하겠다며 치밀한 그림을 그렸던 이번 서울시의 ‘교통혁명’ 계획은 이런 의미에서 단지 우연적인 실수라기보다는 도시계획가의 발상 자체가 갖는 근본적인 결함을 혁명적인 방법으로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사고 및 오류의 폭이 갖는 광대함과 전면성은 그게 아니고선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진경/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