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시대니 인터넷시대니 하는 말들의 유포와 함께 근년 우리 사회는 두 가지 커다란 환상에 마취되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필요한 정보에 빠르게, 그리고 공짜로 접근할 수 있다는 환상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므로 이제 책은 필요없다”라는 환상이다. 인터넷만으로 정보의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있다면 아무도 그 유토피아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종이책 만드느라 애꿎은 나무들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고, 집에는 책이니 책장이니를 둘 필요가 없으니까 공간 넓어져서 좋다. 이사갈 때도 얼마나 편하랴. 무거운 책짐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버리고 갈 책과 가지고 갈 책의 선별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 유토피아의 주민은 그저 책 몇권만 기념으로 갖고 있으면 된다. 나중 손자 녀석들 무릅팍에 앉히고 “얘들아, 우리 때에는 책이란 게 있었어”라며 옛날 얘기 들려주기 위해서는 약간의 ‘기념물’이 있는 게 좋을 테니까 말이다.
인터넷 만능주의의 환상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 인터넷 만능의 현실 속에 있지 못하다. 인터넷으로 습득가능한 정보가 있고 접근할 수 없는 정보, 지식, 경험의 거대한 세계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 접근불가의 영역이 ‘책의 세계’이다. 인터넷은 출판정보를 빠르게 검색할 수 있게 하지만 극소수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짜로 책을 주지 않고 줄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인터넷으로 모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현실을 모르거나 무시할 때에만 가능한 환상, 무지하고 무시무시한 환상이다. 이 환상이 무시무시해지는 것은 “까짓 거, 책 안 보면 될 거 아냐”라며 책을 완전히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그로부터 “이제 책은 필요 없다”로 비약할 때이다. 이 비약은 무시무시하고 환상적인, 요즘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가위(可謂) ‘엽기적’ 만용이다. “이 불출아, 너 아직도 책보니?”에 이르면 이 엽기적 만용은 최고 수준에 도달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만용을 부려도 된다고 믿는 사회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 만용의 사회에서는 아직도 책을 찾는 사람이 되레 바보, 불출, 엽기로 간주된다. 안 그래도 책읽기 문화와는 거리가 먼 사회가 인터넷과 정보시대의 이름으로 더더욱 책을 멀리 하고 책을 읽지 않고 책읽기를 우습게 아는 ‘책맹(冊盲)사회’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책맹은 문맹과는 다르다. 문자를 모르는 것이 문맹(illiteracy)이다. 그러나 문자도 알고, 높은 교육도 받았고, 그래서 책을 읽자면 읽을 수도 있지만 죽지 못해 읽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책읽기 싫고 읽혀지지 않는 것이 ‘책맹’(aliteracy)이다. 학교다닐 때 교과서와 참고서말고는 책 읽어본 일이 없고 그래서 평생 책과 담쌓는 사람도 책맹이다. 책맹이기를 선택한 사람에게 책은 사돈댁 장례식 이상으로 지루하고 따분하고 멍청하다. 그가 보기론 ‘책읽기의 즐거움’ 어쩌고저쩌고 하는 자들이야말로 정말이지 이 시대의 즐거움이 뭔지 모르는 엽기적 얼간이족이다.
책맹들은 말한다. “이 정보화시대에, 아이티(IT)시대에, 인터넷시대에 책이라고?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도서관 타령이야?” 지금이 어느 때냐 하면, 대학도서관에 책이 없어 대학원생들은 징징 울고 교수들은 논문 한편 쓰기 위해 허리 휘게 자기 돈 들여 책을 사야 하는 시대이다.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개인 연구자들이 국내외 도서 구입비로 쓰는 비용은 엄청나다. 책읽고 싶은 가난한 시민은 지역 도서관 가봐야 책이 없으니까 자기 주머니 털어 책을 사든가 아니면 포기해야 한다. 돈 없이는 책도 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정보시대’이다. 지금이 대한민국에서 어느 때냐 하면, 정부가 정보화시대를 조석으로 외쳐대면서도 정작 정보시대의 인프라 중에서도 기본 인프라인 공공도서관은 여전히, 장장 50년이 넘게, 세계 최악의 양적 질적 빈곤상태에 방치되어 있는 시대이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아예 책읽히는 교육이 포기되고 아이들은 밤낮 게임에 빠져 있고 대학생의 90%는 교재 몇권 빼고는 대학 4년을 책맹으로 보내고서도 졸업장 받아 나가는 것이 한국의 정보시대이다. 일시적이고 일회적 쓰임새에 봉사하는 목적성 정보만이 ‘정보’로 착각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보시대이다.
책맹사회이고서도 잘 버틸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지금 생존 세대의 생애 중에는 오지 않는다. 그것은 22세기에도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 책의 세계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정일|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