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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없음’의 의미
2001-06-13

김봉석 칼럼

다시 블록버스터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 식상한 표현처럼, ‘블록버스터’는 매년 여름이나 겨울이면 줄지어 찾아온다. 올해는 유난히 블록버스터의 해악을 떠들어대는 모양인데, 나는 그런 데 관심이 별로 없다. 내가 우매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순간의 오락을 즐기자는 주의 때문일 수도 있다. 하여튼 나는 블록버스터 자체에 대한 반감은 별로 없는 편이다. 이면의 이데올로기나 문화침략 같은 용어들에 대해 듣고 봐도 때로 짜증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별 상관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는 일은, 늘 그런 ‘음모’에 휘말리게 마련이니까. 그게 싫다면 자본주의사회와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된다. 테레사 수녀처럼 타인을 위해 봉사를 하거나, 혹은 체 게바라처럼 혁명가가 되거나. 나는 그냥 일상을 살아가고, 그런 종류의 오락을 즐기고, 잡다한 상품을 구입한다. 살아가야 하니까, 그런 사소한 재미라도 즐겨야지. 그렇게 맘 편하게 생각하고 오늘도 블록버스터를 본다.

거슬러 생각해보면, 내가 영화를 보게 된 과정도 그랬다. 그냥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처음 극장을 가고, TV에서 하는 영화를 보게 되고. 그러다가 그냥 일상이 된 것이다. 뭔가 심심하면 별다른 생각 없이 책을 보거나 영화를 봤다. 초등학교 시절에 본 영화 중에서 기억나는 건 <타워링> <오멘> <스타워즈> 같은 할리우드영화들이다. 나는 그 영화들의 스펙터클에 반했고, 이후에 그런 영화들을 셀 수 없이 봤다. 습관처럼, 집에 돌아가 샤워를 하듯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생각했던 건 아니다. 영화계로 뛰어들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만 그게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기운을 얻는 피안이었을 뿐이다. 물론 <다이하드>처럼 블록버스터에다가도, 어떤 의미를 탁월하게 담아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다.

‘블록버스터는 멍청하다’라는 시각이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싸잡아서, 한마디로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 ‘단정’이 편리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게 낙인을 찍고 나면, 머리 속이 아주 간단해진다. 자신의 논리를 세우기도 쉽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쉽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쉽게 정리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블록버스터는 롤러코스터처럼 순간의 자극만을 준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 자극만을 위해서 일부러 놀이동산에 간다. 그 ‘의미없는’ 자극을 위해서 극장 관람료 몇배의 돈과 시간을 소비한다. 의미가 없을지는 몰라도, 나름의 활력을 준다. 그리고 의미도, 다른 방식으로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때로 세상의 진리는 아주 사소하고, 천박한 것들에서 발아하기도 하니까.

국내 문단에서 판타지나 추리물 등 대중소설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로 경직되어 있다. 그런 오만과 편견을 보고 있으면 좀 피곤해진다. 소위 순수문학 작가라고 해서 다 수준이 높고, ‘올바른’ 사상만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순수문학 역시 때로는 파시즘을 선전하고, 교언영색으로 독자를 현혹시키기도 한다. 대중문학이나 블록버스터는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라고 하지만, 요즘의 순수문학이나 예술영화를 자처하는 것들이 그리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lotu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