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환(1904∼1982)은 나운규와 함께 무성영화 시대의 두 거장으로 꼽힌다. 나운규의
작품세계가 직관적이고 격정적이라면 이규환의 경우 관조적이며 서정적이어서 ‘한국영화사의 시인’으로 불리며, 일제 말기에도 친일영화 만들기를 거부하고
징용생활을 택한 까닭에 ‘한국영화계의 양심’으로 존경받았다.열아홉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예술연구소’에서 6개월간 공부했고, 21살 때에는
상해로 가서 1년간 체류했으며, 다시 일본 신코(新興) 키네마에 입사하여 2년 동안 본격적인 연출 수업을 받았다. 귀국 뒤에 발표한 <임자
없는 나룻배>(1932)는 새로운 영화미를 선보이면서 흥행에도 성공했고 이후 ‘조선영화의 3대 명작’으로 꼽혔다. 다섯편의 작품을 더
발표한 그는 1940년 일제가 ‘조선영화통제주식회사’를 만들어 모든 영화인들을 통제하자 영화 활동을 거부하고 일본군에 징발돼 1년5개월간 징용생활을
했다.
해방이 되자 곧바로 영화 연출을 재개했는데, 1955년작 <춘향전>은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전후 한국영화산업의 부흥에 불을 지폈다.
기록상으로는 이규환의 연출작이 총 22편으로 되어 있으나, 이영일과 대담할 당시인 1960년대 후반에 이미 22편이라고 회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후에 발표한 <배따라기>(1973), <남사당>(1974)을 합하면 전체 필모그래피는 총 24편이 아닌가 추측한다.
내 고향 대구에서 아버지 별명은 ‘호랭이’, 좋게 말하면 호걸남아고 조금 거북하게 말하자면 난봉꾼이었다. 어머님은 성질이 얌전하고 전형적인
현모양처 타입으로 별명이 ‘명주고름’이라 붙었다. 아버지는 젊은 과부 여인과 연애를 하느라 처자는 영 돌보지 않고, 어머니는 무녀독남인 나
하나를 데리고 고모댁의 도움을 받아 생활해왔다. 내 성격이 아버지를 닮은 면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극히 부드러운 면도 있는데 그건 어머니의
영향인 것 같다.
여덟살 되던 봄에 고모댁이 서울에 집을 마련하자 어머니와 함께 따라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식 한놈 공부시키는 걸 낙으로 삼고, 옛날 유명한
판서가 살았다는 190여칸짜리 집 살림을 전부 맡았다. 행랑사람들이 어머니를 ‘대구아’라고 부르면서 참 좋아했다. 나는 집 앞 냇물에서 왜놈
아이들과 편싸움을 많이 했다. 고모댁의 형들은 영웅 숭배자들이어서 늘 서양 전기를 탐독했고 어린 나에게 ‘남한테 져서는 안 된다’며 영웅주의를
주입시켜주었다.
이듬해 홍파동에 있는 사립 보정(普正)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인터뷰 당시인 1960년대 후반-필자) 야당 하다가 납치당해서 행방불명된 신정훈
선생이 당시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내가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우미관, 단성사, 원각사 같은 데서 연속사진을 틀어주던 시절이라서
거기에다 맛을 붙여가지고 우미관 가장자리만 살살 맴돌았다. 내가 결정적으로 예술 방면에 기울어진 원동력은 사촌 형수였다. 시집살이가 따분하고
하니, 날 불러 앉혀놓고 늘 자기가 본 소설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다가 고모댁이 요새로 치면 주식 같은 투기로 재산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서울 생활 8년 만에 대구로 내려가게 되었다. 개성중학교로 전학해서
4학년 되던 해에 삼일운동이 일어나 약관 소년으로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왜놈한테 쫓기어 어머니가 가정부로 계신 밀양 산내면으로 피신을 가서
2년간 생활했다. 후에 내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농촌 장면의 향토적인 화면 구성은 대부분 산내면에서 보던 바로 그 풍경이다.서당에서 한문공부도
하면서 지내다보니 삼일운동의 폭풍이 지나가고 다시 대구로 왔다. 같은 동네에 김기상이라는 동무가 있었는데 그 역시 예술 청년이었다. 나와 함께
밤낮 일문으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을 탐독하고 연극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어떤 길로 나가야 하느냐, 역시 영화로구나’ 생각하면서
그중에서도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감독을 희망하게 되었다.
할리우드행 꿈이 좌절되다
열아홉에 동경에 있는 영화예술연구소에 들어갔다.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하고 오후에 공부를 하면서 6개월간 머물렀다. 그곳에서영화에 대한 실제 기초를 대략 잡았다. 서울로 돌아와보니 <아리랑> 이후에 나운규 전성시대였고 윤봉춘, 안종화, 이구영 이런 분들이
계셨다. 어릴 때부터 길러온 영웅주의 때문인지, 이 틈바구니에 끼일 것이 아니라 해외로 나가 연구를 하고 돌아와 일약 한번 손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상해를 택한 것은 허리우드로 가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떠나기 전날 밤 헝겊에다 남아입지출향관(男兒立志出鄕貫), 남자 뜻을
세워서 고향을 떠나는데 소망불성갱불환(所望不成更不還), 희망한 바를 이루지 못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이렇게 쓴 글귀를 어머니에게 맡겨두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한문을 모르신다. 날이 훤히 밝자 홑이불 하나 뚤뚤 말아 가방에 넣고 길을 나섰다. 타박타박 걷다가 골목을 벗어날 즈음 뒤를
돌아다보니 눈이 막 내리는데 어머니가 문가에 그대로 서서…. 이거 참 화면이….
화물선을 타고 사흘이 걸려 상해에 도착했다. 허리우드에 간다는 것은 망상 중의 망상, 택도 없는 소리였고 말로 할 수 없는 고생이 시작되었다.
복싱선수 이규홍 밑에서 양말도 빨아주고 다리도 주물러주면서 붙어 있다가 그 사람을 통해서 전창근, 이경손씨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양자강>을 완성해서 흥행에 성공한 직후였다. (상해를 비롯한 해외에서 활동하던 영화인들의 존재는 일제시대 영화사를 재기술하는 데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 -필자) 두 사람 덕분에 내가 쓴 시나리오 <영육난무>를 중어로 번역해서 투자전문회사인 장성영평공사에 찾아갈
수 있었다. “습작으로서는 참 많이 생각했고 당신 열성도 좋지만 중어도 모르면서 무슨 조감독을 하겠냐”며 일장 설교만 들었다.
하루는 전창근 감독한테 갔더니 젊은 사람 둘을 인사시켜주었다. 훗날 <임자 없는 나룻배>의 제작자가 된 강정원과 김재수를 만난 것이다.
인생항로에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상해에서 허송세월할 필요 없지 않느냐”며 여비를 마련해주었기에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일본 여행권을 얻느라 각종 조사와 고생을 겪은 끝에 교토에 도착했는데 거기서도 한바탕 닦달을 당하고 새벽에 풀려나왔다. 그때가 스물다섯살이었다.
신코키네마에서 배운 프레임 한개의 중요성
그 당시 니카츠, 도호와 함께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신코(新興) 키네마에 들어가서 감독 수업을 받고 싶었다. 신흥 키네마문 앞에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기에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있기를 한달간 계속했더니, 콘티를 그려보라는 시험을 보게 해주었다.
하루라도 빨리 익혀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잠은 세트에서 자고 밥은 식권으로 해결하며 쉴 새 없이 일을 하였다. 어느날 배우 간사실에서 쉬고
있는데 똥똥한 놈이 와서는 자기도 조선사람이라고 했다. 생김새며 말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왜놈인 듯했다. 알고보니 신흥 키네마 조명감독으로
있던 김성춘이었다(김성춘에 대해서는 이 난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필자). 당시 일본영화계에 공부를 하러 온 영화인은 동아 키네마
촬영부에 양세웅, 감독부에 박기채도 있었다. (“나중에 양세웅과 함께 작품 여러 개 했죠?” -대담 중의 이영일)
첫 작품은 도요다 시로 감독과 했고, 미조구치 겐지 감독과 직접 못해본 것이 유감이지만 일하는 것은 많이 봤다. 그중에서도 스즈끼 주기치 감독은
훗날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많은 조언과 영향을 주었다. (도요타 시로는 1929년에, 미조구치 겐지는 1922년에 첫 작품을 발표했다. 스즈끼
주기치는 1920∼30년대 활동한 스즈끼 시게요시(鈴木重吉)라는 경향파 감독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규환 감독이 한자를 음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 한번은 스즈키 감독과 편집을 하는데 한 콤마가 더 잘렸던 모양인지 그걸 찾아내라고 했다. 밤을 새워 다다미
틈바구니에서 콤마 한 토막을 찾아주니 그것을 딱 이어가지고 넘어가는 걸 보았다. 그때 비로소 한 콤마가 이리도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럭저럭 2년이 흘러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이상 공부를 하면 이것은 하나의 노동일 뿐이었다. 돌아가기 전에 시나리오를 마련해야겠다고 하여 쓴
것이 <임자 없는 나룻배>였다. 왜놈들의 물결이 자꾸 철길을 놓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반항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고, 대신 문명의
이기에 대해 순박한 백성이 반항을 하는 것으로 착상했다.
거의 3년 만에 대구에 내려와 어머니를 찾으니 떠날 때 주머니 안에 넣어준 그 헝겊이 때가 새카맣게 묻은 채 그대로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똘똘 말은 5원짜리를 차비로 주시는데 세상에 불효자식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도 한몫의 영화감독이 못 되고 이렇게 되니 그 한이 참 많다. 영화계는
여전히 나운규의 독무대였고, 나운규 원작·감독·주연의 <개화당이문>이 대구 만정관에서 상영중이었다. 만정관 지배인들을 평소 잘 알고
있어서 무상으로 들락날락하는데 마침 표 받는 자리에 한 친구가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상해에서 만난 김재수였다.이 기록은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녹취·정리 안선주 중앙대 영화과·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