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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들에게 침략군일 뿐이다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지난 며칠간은 참으로 참담한 기분이었다. 김선일씨의 납치 사실도, 피살 소식도 모두 외국 출장 중에 접했으니 놀라고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한국에 있었다고 해봤자, 거리에 나가 촛불 하나 더 드는 것 이외에 무슨 할 일이 있었겠는가마는 그래도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석달 전쯤 평화운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상황이 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세 사람이나 인질로 잡혀 여러 날 고생했는데, 한국인들은 무사한 것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한국인들은 이라크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있어서 아무 탈이 없다는 정말 허황된 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보고 한 얘기였다. 내 방정맞은 얘기 탓에 그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 같아 정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오겠지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시간과 공간은 달라도 게릴라투쟁을 전공한 나는 그런 실낱같은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다.

이라크 한 무장세력이 김선일씨를 살해한 것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똑같은 불행이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면, 그들이 어떤 심리상태에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지를 차분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누구나 생명은 똑같이 소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 모든 생명이 똑같이 소중하게 존중되는 것은 아니다. 김선일씨의 죽음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무게로 다가왔지만, 그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에서 일만몇천몇백몇십몇번째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다. 그의 납치 소식이 전해지기 이전에 김선일이라는 젊은이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우리에게도 그의 죽음이 밤잠을 못 이루게 할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면, 그와 피를 나누고, 사랑과 정을 나누고,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어떤 것이었을까? 김선일이 죽기 이전에 이미 이라크에서는 1만여명이 죽어갔고, 그 죽음을 충격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총을 잡고 게릴라가 되었다.

베트남에서, 그리고 이라크에서 게릴라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힘을 가진 미국이 고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거대한 미국을 향해 총을 들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게릴라들을 소탕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미국 사람들에 비해 게릴라의 심성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교육이 제대로 되었다면, 게릴라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의병이나 독립군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의병이라 부르든 폭도라 부르든 또는 테러리스트라 부르든 게릴라, 그들은 어떤 의미에선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이미 잃어버린 사람들을 게릴라전 상황 바깥에 있는 보통 사람들의 잣대로 봐서는 안 된다. 추상적인 민족주의나 종교적 원리주의만으로 게릴라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복수심, 가족을,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절망과 분노에서 생겨난 복수심 없는 게릴라를 떠올릴 수 없다. 어차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스러져가게 되어 있는 게릴라전에서 게릴라는 간신히 살아남은 나와 내 가족과 내 친구의 목숨인가, 아니면 나와 상관없는, 아니, 우리를 죽이러 온 사람의 목숨인가를 선택하게 된다.

한국이 국익의 이름하에 남의 땅에 군대를 보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이라크의 게릴라들이 자기 땅에서 침략군을 상대로 싸우는 행위를 무어라 하겠는가? 이 정부는 테러에 굴하지 않는다며 파병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되면 제2, 제3의 김선일이 나오는 것은 불가피하다. 침략국가의 반열에 오른 한국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란 게 감사원 감사란다. 살려달라고 절규하던 김선일씨가 정말 외교통상부 직원이 전화 똑바로 받지 못해서 죽임을 당했단 말인가? 잡혀간 다음에 대응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무고한 국민들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게릴라들의 표적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우리가 아무리 평화재건부대라 우겨도 그들에게는 침략군일 뿐이다. 미국 때문에 할 수 없이 보낸다는 약소국의 설움도 입에 담지 말라. 우리는 이미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가진 나라이니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