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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안규철(미술가) 2004-07-09

최근 몇년 사이에 눈이 많이 나빠졌다. 학생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10포인트 크기로 출력해오는 리포트의 잔글씨들을 이제 맨눈으로는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은행에서 예금청구서 같은 것을 적을 때 고객용으로 비치해둔 돋보기에 거리낌없이 손이 가고, 음식점에서 자잘한 글씨로 쓰여진 메뉴판이 나오면 안경을 꺼내기가 싫어서 다른 사람이 시키는 걸 그냥 따라서 주문하게 되었다. 내가 다뤄야 할 세상은 점점 더 작은 기계와 단추와 액정화면 글자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데, 내 눈은 작은 것들을 한사코 외면하려 드는 것이다. 노안(老眼), 노인성 원시라는 것. 카메라로 치면 접사(接寫)기능이 망가진 셈이다. 내 몸에서 가장 투명하고 밝았던 부분에서 발생한 이 파업은, 좀 과장하자면 세상과 사물들이 조금씩 나를 떠나 소실점을 향해 출발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눈이 어두워지는 만큼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유쾌하지 않은 현상의 가장 기이한 특성은 가까울수록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먼 곳의 사물들은 예전처럼 선명한데, 손에 잡히는 근거리의 것들은 초점이 흐려지고 윤곽선이 무너지며 서로 뒤섞인다. 멀리 있는 것이 상대적으로 잘 보이기 때문에, 뭔가를 자세히 살펴보려면 코앞으로 바짝 끌어당겨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팔을 뻗어서 저만큼 멀리 ‘내다’놓고 보아야 한다. 그전까지 내게 익숙했던 사물의 정상적인 질서는 그게 아니었다. 가까울수록 잘 보이던 것에서 멀어야 잘 보이는 것으로 사태가 180도 반전되었다.

어떤 대상을 자세히 보려 할 때 그것과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거리를 두고 보아야 사물의 윤곽이 뚜렷해진다는 것은, 그것만을 집중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의 다른 것들 속에서 다른 것들과 함께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눈은 내게 세상의 자잘한 세부는 이제 그만 들여다보고 시야를 넓혀서 큰 덩어리들을 봐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부터는 부분보다 전체를, 대상 자체보다는 그것과 다른 것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라고 주문하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의미를 가져다 붙이려 해도, 가까울수록 세상이 흐려지는 이 새로운 눈의 질서는 내게 낯설다.

안경은 네개의 지지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눈 바로 아래에 인접해 있는 콧잔등 양쪽과 눈높이에 있는 양쪽 귓바퀴 안쪽 계곡에 걸려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눈 주위의 밋밋한 절벽에서 뭔가를 걸칠 수 있을 만큼 돌출된 부분이 이것들 말고는 없다. 안경의 모양에는 이들 기관의 모양과 관계가 그대로 들어 있으니,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연구한다면 안경 하나만 갖고도 상당히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이들은 모두 외부의 정보를 내부로 받아들이는 장치들로서 협력관계인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귀와 눈의 관계는 주목할 만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할 때 그것은 귀에 대한 눈의 절대 우위를 표현하고 있다. 귀로 백번 듣는 것보다 눈으로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이 유물론적 명제에는 귀에 대한, 그리고 귀를 통해 전해지는 말에 대한 완강한 불신과 홀대가 담겨 있다. 반대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은 눈에 대한 귀의 우위를 표현하고 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한쪽은 눈을 믿으라 하고 다른 한쪽은 귀를 믿으라 한다. 우리가 ‘안경다리’라고 부르는 부분은 그러니까 인류역사를 관통하는 이 역사적인 경쟁자들 사이를 물리적으로 잇는 실질적인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안경을 쓰게 되면서 나는 내 눈이 귀의 도움을 받아서 보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안경의 형상은 본다는 것이 눈만의 독립적인 성취가 아니라 듣는 것, 말과 텍스트에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글·드로잉 안규철/ 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