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리골드(marigold)를 키운 적이 있었다. 금잔화라고도 하던가. 크게 자라도 50cm 남짓 되는데 노란꽃, 주황꽃 등을 피운다. 매리골드가 가득 핀 꽃밭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봄의 내음새가 코를 찌르던 어느 날 흙을 사다가 용기에 깔고서 씨앗을 간격 띄우고 살포시 앉혔다. 그 위에 다시 폭신하게 흙을 덮고 정원으로 향한 부엌 창가에서 날마다 물을 주며 기다렸다. 뾰족하게 올라오는 그 어린 싹들을 발견했을 때의 흐뭇함을 무엇이라 설명하겠는가.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던 그들을 정원 한구석에 옮겨 심던 날은 정말 기르던 자식을 독립시키는 마음이었다. 제 땅에서 잘 자라다오.
봄비도 때맞추어 내려주었다. 그들은 한잎 두잎, 한 마디 한 마디씩 내게 생명의 성장을 선사해주었다. 노오란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그 수줍던 꽃잎들이 얼굴을 보여주던 날들의 만남을 나는 나도 모르게 너무나 사랑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모르던 것은 나보다 더 처절하게 매리골드를 좋아하던 또 다른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가랑비가 내리는 축축한 어스름 저녁이면 꽃밭으로 찾아들었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밤 기운에 이슬이라도 맺히는 찬 새벽조차 그들의 잠입 시간인 것을 나는 키 큰 나무 위로 태양이 한참 떠오른 뒤에야 알았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애석하게도 그들의 애정 표현은 나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출몰하여 호화로운 만찬을 만끽했던 밤이 지나면 난 아침마다 억제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에 휩싸였다. 꽃봉오리를 막 내어놓은 매리골드의 마지막 남은 잎사귀까지 그들이 해치우고 그 봉오리를 받칠 줄기마저 형해만 남아 지탱하기조차 가녀린 자태로 비틀거릴 때 난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뒤로 내게 달팽이라는 이름은 끈적이는 식욕과 탐욕의 대명사였다. 지난 주말 <스펀지>를 보다가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어찌 내가 그때의 분노와 증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화면 가득히 제집을 등에 업고 그 유연한 몸체를 꿈틀대는, 넉넉하다 못해 천연덕스러운 자태 앞에서 매리골드에만 빠져 있던 내가 정작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당근을 그 위로 떨어뜨리면 가볍고 빠르게 두 도막으로 분리시켜주던 검도용 칼의 예리한 날 위에서였다. 그 위에 선 달팽이는 무겁게만 보이던 제집을 적당한 각도로 기울이고 온몸의 세포로 힘을 분산시키며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분명하고 당당하게 움직여나갔다. 물결처럼 퍼지던 살결들, 무거운 짐을 지고도 먹이를 향해 나아가는 일념, 그것은 그들의 생존력이었다. 매리골드에게서도 달팽이에게서도 생존의 논리는 간단하고 명쾌한 것이었고 나의 애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어차피 동물에 비하여 본능의 정확성과 정밀성, 그리고 때로는 예감력이 턱없이 모자란다. 단적으로 우리는 매리골드처럼 맨땅에서 양분을 흡수할 능력이 없고 달팽이처럼 제집을 이고 살 만한 체력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본능의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지능이 있다. 현대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은 바로 이 지능의 개발에 의한 것이다. 우리도 생명인 이상 생존의 권리는 가지고 있는 셈이 아닌가. 하지만 돌아보아야 할 지점은 우리만의 과도한 이기적 생존전략의 결과이다. 과학기술 문명의 혜택을 얻기까지의 인간의 생존전략은 인간 중심의 애증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기준으로 다른 것들을 배제하고 말살해온 것이다.
생존력이 미약했던 시절 원시인들은 동물에게 분명히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부족에게는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맹수가 필요했다. 지금은 그 대신에 만물 위에 군림하는 현대의 인간들에게 달팽이라는 토템을 주면 어떨까. 과도한 지능의 개발과 남용, 그 기반을 딛고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현세의 우리에게 달팽이는 진정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힘의 분산이 필요하며 이기적인 고집과 배타의 틀을 깨는 유연함이 절실함을 가르쳐준다.
내가 사랑한 것은 매리골드였으나 난 그로부터 내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해 배운 것이 없다. 그러나 매리골드 덕분에 그토록 증오했던 달팽이로부터 난 내 애정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차가운 자연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내부에 치우쳐져 있던 편향을 그가 깨뜨리고 아슬아슬한 균형 속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칼날 위를 전진하는 세련된 균형감을.
素霞(소하)/ 고전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