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많은 악당이 있고, 그 악당들이 저지르는 악행이 있고, 그 악행들로 인한 고통과 슬픔과 공포가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다행스럽게,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인간들은 대체로 이기적이며 탐욕으로 가득 차 있고, 진실보다는 거짓이 유리하고, 이성적 논리보다는 물리적 폭력이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세상은 분명히 썩어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전쟁은 점점 더 잦아지고, 더 많이 죽이고, 더 무서운 광기를 보이고, 더 천박한 명분으로 싸운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예술이 온갖 휘황찬란한 꽃을 피워도 인류의 미움과 반목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시들기는커녕 지구를 뒤덮을 기세로 퍼져가는 곰팡이 같다. 이러다가 어느 세월에 진실과 정의가 승리하는 날이 올까. 과연 정의는 세상의 모든 부정과 불의를 물리치고 지상낙원으로 우리를 인도할까.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지만 의외로 악한들이 죽는 날까지 잘 먹고 잘사는 일도 허다하고 착한 사람들이 마음 약하게 조심조심 살다가 갑자기 봉변을 당하는 일도 허다하다. 정의는 과연 존재하는가.
슈퍼 히어로가 있다. 외계에서 온 슈퍼맨, 우연한 사고로 돌연변이가 된 스파이더맨, 또 배트맨, 플래시맨, 아쿠아맨, 원더우먼…. 모두 초인적인 특별한 능력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정의의 수호자들이다. 착한 사람들의 선의와 순리가 나쁜 놈들의 악행과 폭력 아래 신음하는 세상에서 슈퍼 히어로는 얼마나 든든한 희망인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대부분의 슈퍼 히어로들의 전략은 테러리즘이다. 평소에는 평범 이하의 얼뜨기로 존재를 숨기고 있다가 마음껏 활개를 치는 악당 앞에 갑자기 나타나서 마구 혼내준 다음에 부랴부랴 현장에서 달아나야 하는 테러리스트들이다. 진리는 이르기를,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쳤건만, 정의의 용사들은 숨어 살아야 하고 악당은 실질적으로 현실의 많은 부분에 실세로 개입되어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믿는 정의가 꼭 정의가 아닐 수도 있고, 우리가 악이라고 증오하는 것도 꼭 무조건 물리쳐야 능사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은 분명히 썩어가고 있지만, 썩지 않도록 부득부득 막겠다는 정의로운 의지도 꼭 대의명분을 위한 선의라기보다 개인의 간절한 바람이거나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과일이 너무 익어서 결국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떨어져 썩고, 썩어야 새로운 씨앗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듯이, 하나의 종말은 또 다른 탄생이라는 차원에서 지금의 썩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 과연 진정한 정의가 무엇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현실은 만화와는 다르게, 악행을 저지르는 테러리스트들은 복면을 하고 테러를 자행하고 있고, 정의의 이름으로 그들을 응징하는 아메리칸 히어로들은 당당한 신분으로 진군하고 있다. 만화와 반대라서 헛갈려서인지 우리는 그 어느 쪽이 정의라고 판단할 수 없다. 모두가 정의의 이름으로 살육을 교환하는 고통스러운 시대를 건너기 위해서는 큰 진리에 눈뜨는 지혜만이 우리를 현명하게 인도할 것이다.
글·그림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www.theg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