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들어라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그때 우린 저녁을 먹고 있었고 <밥상 앞에선 입다물자>란 가훈이 무색하게 아버진 입을 여셨다. 물론 밥을 입에 넣을 때도 입은 열지만 이번엔 달랐다.
- 나… 회사 그만뒀다.
-아빠
-아버지
-여보
-아범아
밥상에 앉아 있던 우리 모두는 짧게 순간의 감정을 담아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진 짧게 말하고 식사를 계속하셨지만 우린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 왜 잘렸어요?
-아빠 쫓겨난 거야?
-여보 이럴 순 없어요.
-아범아 또냐?
-그런 얼굴들 하지마라. 나 안 죽는다. 나 다시 성공한다. 밥 먹자 찌개 맛있네….
아버진 우릴 진정시키기 위해 말씀하셨겠지만 우린 그 말이 모두 거짓이란 걸 알고 있다.
아버진 언젠가 돌아가실 거고 다시 일어난다 하시지만 사실은 한번도 성공하신 적이 없었으며… 엄마가 끓인 찌개는 장담하건대 맛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가장 중 어느 누구가 힘들지 않을쏘냐. 그 어느 가장이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며 불안 속에 삶을 보내지 않을쏘냐.
아버진 평범한 가장이셨고 어찌보면 아주 평범한 위기에 봉착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사라진 밥상 언저리에서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아버지의 저 힘없는 걸음에 어떤 에너지를 심어드려야 한단 말이냐. 가장의 존재가 실력을 잃었을 때 이 가정의 평안과 행복은 어떠한 방도로 극복해야 한단 말이냐.
가장 먼저 입을 여신 건 연장자셨던 할머니였다.
-걱정할 거 없다 아범은 어렸을 때도 그랬다.
-어머니 그때 하곤 사정이 다르지요.
-매한가지다. 호된 일을 치르고 나면 더 나아지곤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싸움질하다가 학교를 그만 다니고도… 남들보다 훨씬 일찍 군대에 갔다. 난 놈이지….
-어머니 그게 그거랑 상관이 없는 일이지요….
-나 내일부터라도 일자리를 구할래요. 집안 사정이 이런데 나까지 짐이 되는 건 싫어요.
-막내야… 원래 여덟살들은 대부분 짐처럼 산다. 네 나이에 할 만한 일자리는 거의 없다.
-에미야 나도 내일부터는 경로당 고스톱… 독기 품고 치마… 광팔 땐 팔고… 안전할 때 스톱하고… 그것도 몇판 먹으면 솔찮이 돈이 된다.
-저도 새벽마다 신문도 돌리고 우유도 배달하고 할까봐요.
-에미야 아서라… 너까지 그러면 아범 아침은 누가 해서 주냐… 저렇게 기운 빠질 때는 끼니를 거르면 안 된다. 그냥 너는 양기나 보호해주며 잠자리에서나 부담주지 말거라.
-어머님도 참….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다. 2년 연속 부반장을 역임했으며 4학년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건치 아동으로 뽑힌 건강한 학내 지도자인 내가 이대로 내 가정과 우리 아버지의 고난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어머니 할머니… 전 내일 아버지를 해고시킨 기업주를 찾아가겠어요. 그래서 해고 사유와 그 절차가 적법했는지 그 와중에 부당한 일은 없었는지… 알아보고 행여 불순한 음모가 발견되면 그 즉시 산자부와 서울시에 투고하고 법적 절차를 밟겠어요.
누가 들어도 부반장급에서나 나올 수 있는 현명하고도 명확한 정치적 해법이다.
식구들 모두는 나의 의견을 존중했고 난 올해 들어 처음으로 2교시 뒤 조퇴를 단행했다.
난 아버지의 회사를 방문했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다시 저녁 밥상 앞에 모여앉아 나의 아버지 해고의… 진위여부 확인에 숟가락도 못 뜨고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식사들 하시죠… 다녀온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근데 아버지는…?
-방 안에… 그나저나 어서 얘기해다오… 궁금하구나 아들아….
나는 대답 대신 숟가락을 놓고 아버지가 계신 방에 들어갔다.
아버진 힘없이 누워계셨고 누워 있는 아버지 옆에 나도 누웠다. 그리고 오랜만에 아버지의 가슴을 뒤에서 꼭 껴안았다. 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고 아버지도 분명 우셨으리라.
-다녀왔니? 가지 말라니까… 녀석….
-아버지… 아무리 힘드시거나 아니꼬우셔도 그렇죠. 사장님을 그렇게 패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때릴 때 때리더라도 해결은 하시고 와야지… 그렇게 저지르시고 도망을 오시면 어떻게 해요? 아버지 자수하세요… 경찰들 좌악 깔렸어요….
울고 계셨을 아버지의 팔뚝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장진/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