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을 탔다. 누군가 내 옆자리로 엉덩이를 비집고 끼어 앉는 것을 느꼈다. 육십대 초반을 넘어섰을까? 할머니는 청재킷에 꽃무늬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주렁주렁 몇 봉투의 검정 플라스틱 백들과 빛바랜 하늘색 가방을 함께 들고 있었다. 그 속에서 갑자기 거울을 꺼내든 그녀가 정성스레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그리고는 빗을 꺼내들었다.
열심히 빗질을 하는 그녀에게 그제야 난 주의를 돌린다. 빈 국어공책, 외국모델이 표지로 실린 꼬부랑글씨의 잡지, 아침에 지하철역 앞에서 돌리는 무크지 등등을 그녀는 소중하게 한장한장 넘겼다. 거꾸로 들린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딱히 읽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저 흉내만… 이내 그것들을 다시 넣고 빼기를 반복한다. 간간이 백 속에서 구슬주머니를 꺼낸다. 망사주머니에는 오색의 유리구슬이 수십개 들어 있었다. 그 천진한 색채의 현란함이라니….
그녀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거울과 유리구슬을 두고 고민한다. 어느 날 혼자 남겨졌을 때 필요한 것을 하나의 가방 안에 챙기라고 한다면 그대는 무엇을 넣겠는가?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상기시키는 거울을 넣을까, 아니면 보고 만지작거리며 놀 수 있는 구슬을 넣을까. 결혼하고 싶은 여자, 진순애(이태란)와 이신영(명세빈)은 늙어서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렵다. 마흔이 되어서도 노처녀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거울을 꺼내 들면 그곳에는 마흔네 살의 생일에 케이크를 사놓고 자살한 독신녀의 참혹한 얼굴이 오버랩된다. 그들의 거울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른둘이었다.
환상은 없다. 설렘도 없다. 하루하루 두려움에 떠밀려 언제 어디에선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숨어 거울을 꺼내놓고 닦는다. 그러나 아직 기대는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거울 말고도 남은 여생을 함께 보며 살 수 있는 대상을 찾아 내 가방 안에 넣을 수 있겠는가? 방송사 보도국 기자였던 신영은 몸을 던진 취재로 특종상을 받고 나서야 이제는 결혼할 수 있을 것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던 순간, 오랫동안 사귀었던 애인으로부터 이별통고를 받는다. 실연의 상처로 휘청거리는 우울한 날, 어린 시절 첫사랑 신준호(유준상)를 만나 남자와 결혼을 구슬로 만들어 가방 안에 넣을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는 소녀 가장 순애에게는 신영이 일과 준호를 다 가지려고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하나만 가져라. 너는 너무나 많이 누리고 있지 않니. 순애가 일하는 빵집에서 생일 케이크를 사가지고 돌아가 촛불 심지를 세우고 자살한 독신녀, 순애는 귀가하는 버스 구석에서 졸다가 꿈에서 그녀를 만난다. 어찌해볼 수 없는 망연함, 버스 종점의 황량함, 어두워지는 그곳 벤치에 앉아 순애는 무엇을 생각하였는가? 홀로됨의 두려움. 친구도 없다. 친구의 남자라도 나의 허황한 미래를 채워줄 수만 있다면…. 그녀에게는 결혼이라는 구슬이 절실했다. 그들의 고독과 갈망이 수많은 거울과 구슬이 되어 공포라는 가방 안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가공할 만한 미래의 시간을 파들거리는 몸짓으로 주춤거리지 말고 한 발자국만 떼어보자. 걸어가는 발자국들은 실은 균형감각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거울만을 끊임없이 쳐다본다든지, 불현듯 구슬을 찾아 제정신을 잃은 듯 헤맨다든지…. 그렇게 한발로만 서 있으려 하지 말자. 시소를 타듯이 살아가는 아슬아슬한 균형미의 극치를 즐겨보자. 방송사 보도국에서 잘리고 난 뒤 거리의 문제점을 한쪽 코를 막고 제보하는 그 여자. 준호가 순애와 밤을 지낸 것을 알고도 오락실에서 눈을 크게 뜨고 게임에 몰두하던 그 여자. 울고 있지만 울게 하지는 않고 웃고 있지만 정말로 웃게 하지는 않는 그 여자. 그 웃음 뒤의 비애를 가르쳐주려나.
‘여자는 남자의 미래’라는 허황한 구호에 속는 어리석음을 간직한 필요도 없지만 미래라든지 남자라든지 결혼이라든지 하는 거대한 관념 속에 자신을 송두리째 던질 것까지도 없지 않은가. 거울이나 구슬이 과연 그 실존의 병을 치유해주겠는가? 무거운 가방은 버림이 옳다. 집착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당당함과 솔직함으로. 오색찬란한 구슬들이 주머니에서 터져나와 바닥을 구른다. 거울은 깨뜨려버렸다. 그것들 위로 날아다닌다. 파랑새처럼 가볍게 나비처럼 부드럽게. 퍼뜩 스치는 <올드보이>의 한 구절, 흉부에 박힌다. “웃어라. 세상이 그대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素霞(소하)/ 고전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