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영국의 지독한 안개에서 비롯되었다. 추락하는 폭격기에서 낙하산도 없이 뛰어내린 카터를 저승사자는 안개 때문에 그만 놓쳐버렸던 것이다. 20시간 뒤 카터는 천국으로의 소환을 명받지만 추락 전 마지막 교신을 나눈 여인과 이미 사랑에 빠졌다며 천국을 상대로 재판을 요구한다. 전쟁 중의 프로파간다 성격이 강했던 전작들과 달리 논쟁적인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을 만든 뒤 파웰 & 프레스버거가 선택한 것은 로맨스판타지였다. 우리에겐 미국 개봉시의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파웰 감독이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한 영화였다(반면 프레스버거는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를 더 좋아했다). 비록 영미관계 개선을 위한 영국 정보부의 요청으로 제작되었으나 영화는 증오로 인한 죽음 대신 사랑으로 새 삶을 만들어내자는 순수한 메시지를 담았다.
박스 세트로 발매된 ‘파웰 & 프레스버거 컬렉션’에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 이외에도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과 국내팬들에게 잘 알려진 <흑수선> <분홍신>도 함께 수록됐다(공통된 주제를 생각하자면 이번주 박스 세트를 ‘파웰 & 프레스버거의 생과 사 컬렉션’으로 불러도 될 것이다). 과거 크라이테리언 판본으로 발매되었던 <분홍신>은 이번주 박스 세트에선 칼턴 판본을 담아 오해의 여지를 없앴다. 작품마다 담긴 부록에서 촬영감독 잭 카디프는 영화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 지상을 흑백, 천국을 컬러로 찍지 않은 것에 대해 모두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므로 감독이 오히려 반대의 방식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에서 어색한 테오의 영어 대사를 빌리자면 캔디 장군의 박제 컬렉션마냥 당신의 컬렉션의 상좌에 앉혀도 모두 손색없는 ‘Very Much’ DVD 박스 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