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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계의 희귀종

KBS1 <가족오락관>은 멸종동물을 보는 것 같은 신기함을 준다. 이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는다. 1984년 4월에 첫 방송을 시작해 20년 동안 장수하고 있는 <가족오락관>이 6월19일로 방송 1000회를 맞는다.

놀라운 것은 이 프로그램이 토요일 오후 6시 ‘황금시간대’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프로그램의 포맷이 20년 전의 원형질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근근이 연명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10% 안팎의 시청률을 자랑한다. 같은 시간대의 오락 프로그램에 전혀 밀리지 않는 수치다. 장수 중에서도 건강 장수인 셈이다.

무릇 모든 장수에는 ‘비결’이 있게 마련이다. <가족오락관>의 장수 비결은 사람의 그것과 비슷하다. 우선 장수의 기본원칙인 단순함을 잃지 않는다. O, X 게임, 스피드 퀴즈, 앙케트 맞히기…. 조금만 ‘참고’ 보면 단순한 즐거움에 빠질 수도 있다. 조금만 더 ‘참고’ 보면 그 단순함이 멈춰서 있지 않고 서서히 진화해왔음도 눈치챌 수 있다. 스피드 퀴즈는 단순한 문제 맞히기에서 문제 맞히면서 돈세기로 진화했다. 센 돈까지 정확히 기억해야 맞힌 점수를 주는 것이다.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오락 프로그램들이 외국 프로그램 베끼기 시비에 휘말릴 때, 이 프로그램은 나름의 양식을 진화시켜온 것이다. 그 진화의 동력은 주요 시청층인 주부들의 날로 높아져가는 ‘눈높이’였을 게다.

‘오버’해서 말하면, 장수 프로그램답게 인생철학도 담고 있다. 여성 3명으로 구성된 룰루랄라 시스터즈가 나와 엉뚱한 노래에 이상한 가사를 붙여놓고, 그 가사 중의 일부가 어떤 노래인지에서 따왔는지를 맞히는 ‘룰루랄라 노래방’이란 게임이 있다. 이 게임에서 어떤 노래인지를 맞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래를 맞힌 팀이 먼저 노래할 기회를 갖지만 음정, 박자, 가사 중 하나만 틀려도 땡! 기회는 상대팀으로 넘어간다. 그 노래를 상대팀이 ‘완창’하면 승리. 이처럼 ‘룰루랄라 노래방’에는 ‘인생역전’의 진리가 담겨 있다. 또 다른 코너인 ‘퀴즈 5인5답’에는 ‘인생무상’의 교훈이 녹아 있다. 예컨대 사회자가 동명이인 연예인을 대라는 문제를 낸다. 5명이 잇따라 정답을 맞혀야 승리할 수 있다. 4명이 정답을 맞히더라도 마지막 1명이 틀리면 꽝! 역시 기회는 상대팀에 돌아간다. 색다른 룰은 상대팀은 먼저 팀이 말한 정답을 그대로 반복해도 된다는 것. 이런 식으로 게임을 하다보면 결국 두팀이 서로 ‘공조’하는 효과가 생긴다. ‘커닝’만 잘하면, 정답을 더 적게 생각해내고도 이길 수 있다. 잘난 놈이 꼭 승리하지는 않는다는 인생 교훈, 이라면 오버일까?

이 프로그램에서 진짜 ‘오버’하는 사람들은 방청객이다. 아니 그들은 박수치는 방청객이 아니라 참여하는 응원단이다. 부녀회, 동창회 등에서 나온 중년 여성들은 도통 가만히 앉아 있지를 않는다. 박장대소를 하고, 정답도 슬쩍 알려준다. 게임에 참여해 노래도 부른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돼, 방청객이 출연진을 초청해서 동네잔치를 벌이는 분위기다. 동네잔치를 벌이려는 부녀회가 너무 많아서 방청을 하려면 6개월씩 기다려야 한다.

이제는 ‘브라운관’에서 보기 힘든 그때 그 얼굴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 얼굴의 늘어난 주름살을 보면서 가끔 ‘센치멘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물간 연예인만 나올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최근에만 코요테, 베이비복스가 <가족오락관>에 떴다.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는 사회자 허참이다. 허참은 87년 교통사고로 입원해 단 한번 쉰 것을 빼고는 20년 동안 개근을 했다. 그동안 정소녀에서 장서희를 거쳐 이주희까지, 16명의 여성 사회자가 거쳐갔다. 터줏대감 이경규에 김용만, 박수홍 같은 ‘잘 나가는’ 연예인을 내세워 여전히 시청률 30%대를 유지하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와 20년 동안 같은 사회자를 고수한 <가족오락관>은 대조되는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 사이 <가족오락관>은 ‘주부오락관’이 됐다. 가족 모두가 보는 인기 프로그램에서 주부들이 주로 방청하고, 시청하는 마니아 프로그램으로 바뀐 것이다. 돌이켜보면, 20년 전에는 <가족오락관>의 이름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주말이면 엄마, 아빠, 아들, 딸이 모여 앉아 <가족오락관>을 보고는 했다. 하지만 20년이 흐르는 동안, 텔레비전 앞에 ‘바람난 가족’들은 떠나고 주부들만 남았다. 토요일 저녁, 남편은 일하느라 늦고, 자식들은 노느라 바쁘다. 그 변화는 한국사회 가족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가족오락관>은 또한 한국사회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상징한다. <가족오락관>은 트렌디한 드라마, 화려한 쇼 못지않게 순박한 오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한국사회의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세월이 갈수록 세대 차이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하지만 <가족오락관>은 자주 잊혀지고, 때때로 무시당하는 그 감수성의 존재증명이다.

그래서 <가족오락관>은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과 함께한 시대를 상징하는 지표처럼 보인다. 이 프로그램들은 가족드라마, 가족오락 프로그램이 사라진 (혹은 사라져가는) 시대에 살아남은 희귀종들이다. 비록 화려한 조명은 받지 못할지라도 굵고 짧게 살다가 숱한 인기 프로그램의 묘비명 틈새에서 <가족오락관>은 가늘고 길게 살아남았다. 그 질긴 생존은 한 시대가 완전히 저물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전원일기>의 종결이 한 계층 역사적 퇴장, 한 시대의 마감을 상징했던 것처럼.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