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am 1998년
감독 마크 레빈 출연 사울 윌리엄스
EBS 6월5일(토) 밤 11시
비교적 최근 개봉했던 영화 중에서 이라는 작품이 있다. 커티스 핸슨 감독이 만든 의 주인공은 에미넴. 세계적인 래퍼를 주연배우로 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라는 영화는 음악과 연기도 좋았지만 다른 요소가 더 인상적이었다. 영화 배경이 되는 미국 디트로이트라는 도시를 포착하는 방식이다. 뒷골목에서 공장으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를 차례로 오가면서 이 영화는 미국 어느 도시의 ‘공기’를 세심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곳을 한번도 방문한 적 없는 사람이라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공기의 농도가 진하다. <슬램>은 문화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인 면에서 과 유사한 점이 많은 영화다.
뒷골목 래퍼이자 언더그라운드 시인, 레이몬드 조슈아. 그는 마리화나를 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그는 친구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총격 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구속된다. 독방에 수감된 레이를 사이에 두고 두패로 갈려 있는 교도소의 죄수들은 일을 꾸민다. 레이는 우연히 글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하는 로렌을 만난다. 그녀의 수업에 들어간 레이. 그때까지 입으로만 시를 만들고 흥얼거렸던 그는 글을 배우고 본격적으로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둘의 사랑은 점점 깊어간다.
영화제목 ‘슬램’은 랩과 시가 혼합된 문화를 일컫는다. 화면에서 슬램을 구사하는 예술가들은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심지어 감옥에서 인생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어둠에 대해서 논한다. 감독인 마크 레빈(그는 놀랍게도 백인이다)은 뉴욕 등을 무대로 인종편견, 흑인 슬럼가의 궁핍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경력이 있다. 그는 케이블 방송의 유명 작가였으며 <갱들의 전쟁>(1994), <마약전쟁의 죄수들>(1996)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영화로 발길을 옮긴 감독은 <슬램>에서 다큐멘터리 기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카메라의 기동성을 살려 현장감을 최대한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 감옥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실제 죄수들이 출연하고 있으며 이들의 욕설과 거친 몸동작만으로 영화는 들뜬 분위기로 직행한다.
영화에서 출감한 레이는 동네 친구들과 재회하지만 친구들은 복수의 칼날을 가는 중이다. 레이는 복수 대신, 평화를 충고한다. 험한 인생을 살아온 로렌은 외부세계와 당당히 맞서고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연 사울 윌리엄스는 <슬램>을 보는 이들에게 특별한 연기를 선사한다. 시인이자 래퍼인 그는 “난 영원의 날개 위에 앉아 있는 시인. 난 나일 뿐이야”라고 읊조린다. 개인적인 넋두리가 될지, 혹은 천재 시인의 랩이 될지 보는 이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가 즉흥적으로 내뱉는 시어(詩語)의 판타지는 대단히 아름답다. 보고 있노라면, 듣고 있노라면 넋을 잃을 정도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