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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들은 살아 있잖아

이달 초, 집에 우환이 있어 한 닷새 정도 신문, 방송, 인터넷을 통 볼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일을 치르고 나서 보니 세상은 온통 이라크에서의 미군에 의한 포로학대로 시끌벅적했다. 공개된 사진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요즈음 식의 귀엽고 깜찍한 ‘엽기’가 등장하기 이전의 역겨운 ‘엽기’가 컴퓨터화면을 가득 메웠다. 그렇지 않아도 큰일을 치르고 멍해진 내 머리는 또다시 띵해졌다.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포로학대에 대한 보복이라며 검은 복면을 한 이라크 무장세력이 미국인 한 사람의 목을 베는 광경이 동영상으로 공개되었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장면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속속 공개되고 있다.

뉴스를 접하지 못하는 동안, 나는 황망한 중에도 이라크 팔루자 학살의 속보가 궁금했었다. 미군의 봉쇄가 풀려 자세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겠지 하는 생각에 여기저기 사이트를 기웃거려보았으나 포로학대 얘기만 가득할 뿐, 뜻밖에 팔루자 소식을 찾기는 어려웠다. 1천명 안팎의 목숨을 앗아간 팔루자 학살은 포로학대로, 그리고 미국인 처형으로 이어지는 새 소식에 묻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학살이고, 포로학대고, 보복처형이고, 사체훼손이고 모두 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인도적인 전쟁범죄들이다. 그런데 서방세계는 학살에 대해서는 ‘무덤덤’하면서 포로학대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떨고 있다. 미국인 참수에 대해 일부에서는 포로학대 파문을 잠재울 ‘호재’로 여기기까지 하고 있다.

수백명이 죽어나간 처참한 학살의 사진보다 이번 포로학대의 사진이 더 충격적인 이유는 어쩌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이 사진을 찍었기 때문은 아닐까? 학살의 사진은 대개 죽은 사람은 즐비한데 죽인 놈은 없는 그런 광경을 담고 있다. 장난기어린 표정의 가해자가- 자신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치즈’ 하는 표정으로 찍은 사진은 확실히 엽기적이다. 죽은 피해자보다 아직 살아 숨쉬는 피해자의 사진이 더 충격을 주는 것이 생명의 힘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울퉁불퉁한 것처럼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죽어서까지 평등하지 않다. 미국인의 죽음에는 서방 언론이 주목하면서,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이라크 사람이라도 팔루자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언론의 관심에서 이미 밀려나 있지만,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주목을 받는다. 한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파괴된 것과 같은 일이다. 팔루자에서 800명이 죽었다는 것은 피해자들의 입장에서는 800개의 우주가 파괴된 것과 같은 일이다.

전쟁이란 것이 인권에서 가장 근본인 생명권을 짓밟는 것이라는 사실은 도외시하면서, 제네바 협약 등을 들먹이며 포로학대는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라고 열변을 토하는 것은 위선이 아니면 무지이다. 전쟁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포로학대만을 문제삼다보면, 우리는 전쟁을 좀더 합리적, 이성적으로, 게다가 ‘인도주의적’으로 규칙에 맞게 치르는 방법을 개발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긴 이번 이라크전쟁조차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이라크 민중에게 평화와 민주주의를 가져다주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다고 하니까….

2차대전이 끝나고 일본인들이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A급 전범으로 일본인 7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B, C급 전범으로 기소된 조선 사람은 모두 129명이고, 그중 미군에 의해 사형당한 사람은 무려 23명이다. 뺨때린 게 기소장에 나온 가장 가혹한 행위였다는 어떤 할아버지는 1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야 풀려났다. 일본인들이 전후에 처벌받을 것이 뻔한 미군과 영국군 포로감시 임무에 조선인을 내몬 결과였다. 이런 아픈 역사를 갖고 있건만, 우리 정부는 이라크에서의 포로학대에 마지못해 유감을 표명했고, 파병정책에는 변함이 없단다.

1980년 광주, 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장악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상무대 영창 등에 감금되었다. 여기서도 ‘폭도’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과 폭력, 가혹행위가 쏟아졌다. 그 고통의 순간에 그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아”라며 몸부림쳤을 것이다. 고문이 오죽 힘들었으면 <송환>에서도 조창손 할아버지조차 상륙 당시에 죽은 동지의 묘소를 찾아가, 그 지긋지긋한 전향공작 기간을 떠올리며 “한때는 동지를 부러워했습니다”라고 말했겠는가? 그러나 지금 살아남은 사람들이 광주를 기억할 때, 돌아가신 분들 앞에 먼저 옷깃을 여미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