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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화분
안규철(미술가) 2004-05-28

전시회를 열면 친지들이 꽃을 보내온다. 꽃에 대해서 거의 백치나 다름없는 나도 그 덕에 모처럼 꽃을 가까이 해본다. 오토바이 헬멧을 쓴 꽃집 아저씨가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붓글씨로 적은 꽃다발이나 화분을 가져다놓고 인수증에 서명을 받아간다. 화환을 정중히 사절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축하하는 마음을, 또는 감사하거나 애도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더 나은 수단을 찾아내지 못한 것 같다. 어버이날에 아이들이 달아주는 카네이션, 직장에서 승진하거나 자리를 옮긴 사람들에게 배달되는 난초 화분, 장례식장의 흰 국화 화환과 연인에게 슬며시 건네주는 붉은 장미…. 그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오래된 기호이다.

그저 전시장에 와주는 것만으로, 또는 축하한다는 한마디 말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면서도 그 화사한 꽃이라는 기호에 말과는 또 다른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먹을 수도 없고 입을 수도 없으며 황금이나 보석처럼 오래가지도 않는다. 꺾으면 쉽게 꺾을 수 있는 이 연약한 존재는 이내 시들고 말라서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한 존재가 이처럼 허망한 소멸의 운명을 알면서, 혹은 모르는 채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한순간 이 세상에 없는 저만의 빛깔과 향기를 내놓는 데 열중하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화려한 장미와 백합만이 아니라 민들레와 도라지꽃에도 거기에는 자신의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 존재의 지극함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꽃에 매혹되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넘는 이 지극함과 관련이 있다. 그 경이로운 느낌을 달리 말할 수 없어서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그런 상태에 다가가기를 꿈꾸며 미술을 하고 있지만, 전시장의 작품들이 과연 한 송이 꽃만큼 훌륭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아무튼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전해야 할 이런 경우에 꽃을 대신할 마땅한 기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물질과 물질 아닌 것 사이, 존재와 소멸의 경계에 있는 그런 선물은 정말 흔치 않다. 그러므로 아마 꽃들은 우리에게서 남에게 전해줄 ‘마음’이란 것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멸종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콘크리트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배달하는 꽃집들도 문을 닫지는 않을 것이다.

화려하지만 시들면 버려야 하는 꽃다발과는 달리 화분은 오래간다. 전시회 때 친지들이 보내준 화분을 거실에 두고 물을 주며 키운다. 서양난도 있고 벤자민도 있다. 어쩐 일인지 요즘은 예전에 무심했던 그 화분 속의 식물들에 눈길이 간다. 꽃은 이미 져버렸고 언제 그런 날이 다시 와서 화사한 꽃이 필지 알 수 없다. 거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 속에 어쩌다 게으름을 피우며 앉아 있다보면 그것들과 내가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한 지붕 밑에 살게 되었나 싶을 때가 있다. 파릇한 새잎이 나오면 반갑고 잎이 시들면 걱정이 된다. 그래도 그것들이 애완견이나 금붕어처럼 그 이상의 배려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다행스럽다.

화분은 잘못된 이름이다. 꽃이 잠시 피었다가 지면 대부분의 세월은 잎사귀와 줄기만이 담겨 있는 그릇이다. 그것은 땅에 뿌리를 박아야 살 수 있는 식물을 땅에서 떼어내 한줌 흙덩이 위에서 떠돌이로 살아가게 한다. 나무에게 그것은 세계 전체이자 벗어날 수 없는 현재이며 미래이다. 꽃나무는 화분에 담겨진 흙의 부피만큼, 주어지는 양분과 햇빛만큼으로 제한된 현재를 견디며 미래를 꿈꾼다. 벌과 나비가 들어올 수 없는 불임의 공간 속에서 필사적으로 해를 향해 새 잎사귀를 펼쳐내고 남몰래 빛깔들을 모아 절망적인 꽃을 피운다. 그런 꽃만을 보려고 나무를 키우는 건 야박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꽃이니 나무니 하는 것에 마음이 가는 것은 나이가 드는 증거라고 한다. 벚꽃놀이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모양이다.

글·드로잉 안규철/ 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