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어른과 구별되는 ‘어린이’란 관념이 발생한 것은 17세기경이었다. 어린이가 어른과 달리 순진무구하고, 그래서 오염되기 쉬운 존재라는 생각이 나타났고, 그 결과 어린이를 어른들로부터 분리하여 교육시키는 새로운 학교들이 생겨났다. 이전에는 아이들이 일을 해야 하는 경제적 대상이었다면, 그때 이후 점점 껴안고 입맞추고 싶은 정서적 대상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서서히 가족생활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물론 이 모두는 그런 걸 챙겨줄 수 있던 귀족이나 상층 부르주아들에게만 한정된 것이었지만.
어린이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사회에 특징적인 것이었다. 즉 근대화는 어린이에 대한 이런 관념을 동반하며 진행된다. 급속한 근대화를 꿈꾸었던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이 ‘낯선’ 풍경은 낯선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어린이를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일년에 하루라도 어린이를 대접해주는 날을 만들었다. ‘조국을 잃은’ 비장함을 안고 ‘선진’ 일본에 건너갔던 방정환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귀국한 뒤 <어린이>란 잡지도 만들고, 어린이를 대접하고 가르치자는 운동을 한다.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것은 이런 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린이는 이미 제왕으로서 가족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하루가 아니라 일년 365일이 어린이를 배려하고 대접하는 그런 시대 아닌가! 어린이를 위한 놀이와 도구들, 옷이 아이들의 방에 넘쳐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어린이날은 이미 존재이유를 상실했다. 반대로 그날은 챙겨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결핍과 불행을 곱빼기로 뻥튀겨서 상기해야 하는 가슴 아픈 날이 되지 않았던가?
이런 이유에서 나는 몇년 전 신문에 칼럼이란 걸 처음 쓰면서 어린이날을 없애자고 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칼럼에 대해 아는 분들로부터 적지 않은 항의를 받았었다. 그런데 그 항의는 한결같았다. “왜 어린이날만 없애야 되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어린이날 덕분에 만들어진 날들로 5월 달력은 가득 차 있다. 어린이날에 균형을 맞추려고 만들어진 어머니날이 다시 어머니와 아버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버이날로 되고, 부모에 대한 균형을 위해 스승의 날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채워진 5월 전체를 ‘가정의 달’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래서 가령 기혼여성의 경우에는 5월은 정말 끔찍한 달일 게다. 애들도 챙겨야지, 부모와 시부모 챙겨야지, 거기다 학교라도 다니는 사람이라면 거기다 더해서 선생님도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과 동시에 ‘스위트 홈’의 환상 속에서 삶을 설계하며, 일년 내내 그 ‘달콤한’ 가정 주변을 맴도는 우리네 근대인의 삶에서 이 기념일들은 다른 종류의 삶, 다른 방식의 삶은 더욱더 꿈꾸지 못하게 만드는 굴레가 된 게 아닐까?
지금도 이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에 김혜자씨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을 읽고서 생각이 달라졌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화폐와 이윤 등을 필두로 하는 끔찍한 ‘어른들의 세계’에 의해 성적으로, 육체적으로 착취당하는 아이들, 가난과 굶주림, 질병과 전쟁 등으로 태어나자마자 죽음보다 끔찍한 생존의 고통에 시달리는 아이들, 혹은 전쟁과 마약으로 너무 일찍 어른들의 끔찍한 삶을 미리 당겨서 살고 있는 아이들. 지구 전체 면적의 거대한 부분이 이런 아이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 대해, 이런 아이들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아마도 이런 아이들이 있는 한 어린이날은 여전히 존속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충분히 제왕이 된 우리의 아이들을 다시 한번 대접하는 날이 아니라, 저토록 처참하게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타인들의 삶에 눈을 돌리고, 자기자식만의 삶이 아니라 고통받는 아이들의 삶을 위해 무언가를 시작하는 날이 될 때, 그날은 우리를 낡은 삶의 궤도에 가두는 굴레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새로운 삶의 시작하는 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