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을 이처럼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때가 또 있을까? 일제시대부터 활동한 초창기 영화인들의 육성이 <씨네21>에 연재되는 몇달간은 100년에 걸친 세 세대의 만남이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순간이 될 것이다.
고(故) 이영일(1932∼2001) 선생은 한국영화사의 독보적 저술이 된 <한국영화전사>(1969년 간행)의 집필을 준비하면서, 당시 생존해 있던 영화계의 선구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녹음해 두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어린 연구자들이 다시 앞선 두 세대의 육성이 함께 살아 있는 녹음 자료들을 듣고 글로 받아 적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국영화사의 제3세대로 위치지어진 이 젊은이들이 앞으로 이 난을 통해 초기 영화인들의 삶과 영화계 실상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다. 그야말로 3세대가 한 세기의 세월을 뛰어넘어 ‘대화’하는 진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이영일, 죽은 나무를 살리려던 사람
이 작업은 오랫동안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한국영화사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공유하는 데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영화계는 불행하게도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이든 사회든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경험들이 축적된 것이며, 미래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함으로써 상상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한국영화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한국영화사에는 세번의 중흥기가 있다. 19세기 말에 영화가 도입된 이래 빠른 정착 과정을 거쳐 1920∼30년대에는 나운규의 <아리랑>을 기점으로 하는 무성영화 전성기를 이루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강제적인 조치로 사실상 독자적인 영화제작이 불가능했던 침묵 상태를 지나고 해방과 6·25를 거쳐, 1950∼60년대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황금기였다. 거장들이 연이어 탄생하고 수많은 걸작과 문제작들이 줄을 이음으로써 한국영화의 독자적인 미학이 수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다시 들어서고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간섭이 심해지자 영화는 다시 60년대 후반부터 완연하게 피로한 기색을 보이다가 70년대에 이르면 궤멸 상태에 빠진다. 8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기지개를 켜고 90년대의 회복기를 거쳐 오늘날 제3의 중흥기를 맞이하기까지, 한동안 ‘국산영화’ ‘방화’라는 말은 음습한 사창가를 연상시키는 경멸의 뉘앙스로 사용되기조차 했다.
식민지와 군사독재의 흔적은 지금도 혹독하게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150여편의 극영화 가운데 단 한편도 우리 손에 남아 있지 않으며, 1950∼60년대 작품들 가운데서도 유실되었거나 불완전한 상태로 보관된 것이 많다. 더 큰 문제는 남아 있는 작품들조차 국내외에 보급될 수 있는 어떠한 방책도 마련되지 않은 채 보관소에서 ‘안전하게’ 잠을 자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지만.
역사 서술이 중단되고 미학에 대한 탐구가 실종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하여 최근 소수의 연구자들이 내놓고 있는 기념할 만한 몇몇 저술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어떤 영화감독도 김기영이나 신상옥, 유현목, 이만희로부터 배웠다고 말하지 않으며, 평론가들은 동시대의 영화를 논할 때 유럽과 미국, 일본의 영화역사를 찾아 헤맨다.
이와 같은 역사의 황무지 때문에 이영일 선생의 존재 가치는 더욱 빛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던 선생은 영화사와 이론, 비평을 활성화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1958년 <현대영화>를 창간했다. 타계하기 몇년 전까지 사재와 건강을 바쳐가며 이끌어온 월간 <영화예술>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의 운명이 그때 시작된 셈이다. 선생은 “잡지를 내야 하니까 영화사를 정리할 필요를 느꼈고, 그때부터 영화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영화사란 필름이 아니라 사람들의 역사가 중요”
<한국영화전사>를 집필하기 위한 준비작업은 1959년부터 시작되었다. 도서관을 뒤져 당시 남아 있던 문헌자료들을 손으로 베끼고 복사하고 신문에 나온 스틸사진들을 카메라로 찍으면서 자료준비를 마쳤지만 붓이 나가질 않았던 선생은 당시 생존해 있는 영화계 원로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남으로써 결정적인 도움을 받는다.
“내가 몰랐던 것은, 일년에 한두편 정도밖에 만들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영화 하겠다고 집안의 만류를 뿌리치고 입지도 먹지도 않고 영화를 했다는 거다. 그분들이 겪었던 일 하나하나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영화사란 단지 필름의 역사가 아니라 그걸 만든 사람들의 역사가 중요한 거였다. 도대체 영화역사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그 에너지는 무엇이며 그들의 희망은 무엇인가…. 난 그게 있어야 참된 역사라고 본다.” 선생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영일, 역사란 죽은 나무를 되살리는 일, <트랜스> 창간호, 2000년)
<한국영화전사>가 나온 뒤 선생 자신이 다시 망각의 숲에 버려져 오래도록 발견되고 계승되기를 기다리다가 90년대로부터의 호출에 응답하면서 뚜벅뚜벅 걸어나오던 그날의 만남은 전율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분을 위하여 언젠가 무엇이든 하리라’고 마음먹게 된 것도 바로 이때인데, 지난해 여름 건강 악화를 감지한 선생은 필자에게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과 <일제시대 영화인 증언록>의 발행 계획을 설명하고 길을 찾아볼 것을 당부했다.
서류 한장 달랑 들고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필자를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의 김혜준 실장이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적법한 길을 찾아낸 정책연구실 덕분에 지난해 말 두책의 발간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갖추어졌다. 살아 있는 유령처럼 오랜 지병으로 창백하면서도 형형하게 빛나던 선생의 정신세계가 어린 학생들을 사로잡아, 십여명의 자발적인 ‘연구팀’도 구성되었다.필생의 숙제가 돌파구를 얻었다고 느낀 영혼이 고단한 육체를 벗고 싶었던 것일까. 선생은 올해 1월 병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프로젝트 팀원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유업을 잘 마치라”는 말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덩그렇게 남은 어린 연구자들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는 녹음테이프 스물아홉개와 3학기에 걸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의록, 그리고 <한국영화전사> 복사본 몇권만이 남겨졌다. ‘이영일 프로젝트’를 끌어가는 도정에서 안팎으로 산적한 문제들이 하나하나 불거질 때마다, 선생의 영혼이 결코 이 일을 떠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낙관적인 기분이 회복되곤 한다.
한국영화사 3세대의 아름다운 만남
선생은 열아홉분의 원로를 인터뷰했다고 증언했으나 현재 확보된 것은 열분의 자료에 불과하다. 유족과 함께 서고와 지하실의 자료더미를 여러 차례에 걸쳐 샅샅이 뒤졌지만 신일선(<아리랑>의 주연 여배우) 등 일부 녹음테이프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지난해에 <영화예술> 사무실을 폐쇄하는 과정이나 자료를 빌려간 후학들의 경솔함 등으로 유실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원자료는 릴테이프에 녹음되었으나, 작업은 선생이 70년대에 카세트테이프로 옮겨놓은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릴테이프는 대부분 망실된 것으로 보이며, 두어개가 남아 있지만 재생을 위해서는 오늘날 구하기 어려운 장비를 필요로 한다. 대부분의 카세트테이프가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녹음 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출판 과정에서는 적절한 보완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 같다.
어쨌거나, <씨네21>쪽의 제안을 생전의 선생이 동의하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지지함에 따라 열분의 일제시대 영화인들의 육성이 이제 공개된다. 김성춘, 복혜숙, 성동호, 윤봉춘, 이경순, 이구영, 이규환, 이창근, 이필우, 최금동 등 한국영화사의 제1중흥기에 핵심인물로 활동했고 제2중흥기의 초석을 놓은 영화인들의 진술을 통해 기술, 연기, 각본, 감독, 평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영화사적 사실들을 듣게 될 것이다. “작가의 영화세계와 그들의 개인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이영일 선생의 소신대로 각 영화인들의 성장기와 개인사적인 이야기들도 지면이 허용하는 한 수록할 것이며, 가급적 구어체의 맛이 살아나도록 할 예정이다.
연재 작업은 지금까지 ‘이영일 프로젝트’를 함께해온 김경민(영상원 영상이론과), 김정구(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안선주(중앙대 영화과), 이기림(동국대 연극영화과 석사과정), 이설화(영상원 영상이론과), 이유미(영상원 영상이론과), 최예정(연극원 연극학과) 등 7명의 ‘연구원’들이 직접 담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적절한 분량으로 요약·정리하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출판할 때에는 “숨소리도 빠뜨리지 말라”는 이영일 선생의 뜻에 따라 전문을 충실히 수록하여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과 함께 올해 안에 발간할 계획이다.
3세대 100년에 걸친 이 진기하고도 아름다운 행렬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한국영화사의 복원이 오늘날 영화계가 누리고 있는 호사를 질적으로 성숙시키고 ‘르네상스’를 장기 지속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명분과 실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필자들의 원고료와 별도로 이영일 선생의 자료비를 책정해준 <씨네21>의 뜻에 공감과 감사를 표한다.
김소희/ 영화평론가.한국영화사 연구자 cwg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