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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시즘
2001-06-07

듀나의 오!컬트

제가 진짜 로맨스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한 건 대프니 뒤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를 읽으면서부터였습니다. 네, 전 <레베카>를 소설부터 먼저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낱권으로 샀던 동서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한권이었지요. 영화를 본 건 몇달 뒤였습니다. 사실 좀 일찍 볼 수도 있었는데, 주말 밤마다 텔레비전에 붙어 있다가 잠시 야간 시청을 금지당했었답니다. 그날이 아직도 기억나요. 잭 레먼 주연의 <아반티!>가 한창 클라이맥스를 향해 질주하던 중이었지요. 전 아직도 그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모른답니다.

다시 <레베카> 이야기로 돌아가죠. 로맨스이야기를 하다 말았는데…. 아, 맞아. 이름없는 주인공과 맥시밀리언 드 윈터의 로맨스가 그렇게 강렬했냐고요? 천만에요. 저 자신이 꽤 서툴고 수줍은 사람이라 종종 그 이름없는 주인공에 감정이입이 되기는 합니다만 로맨스까지 접어들면 전혀 감이 안 와요. 게다가 맥시밀리언 드 윈터는 꼭 카본 카피한 로체스터 같은 사람으로, 개성도 매력도 없습니다. 영화 속의 로렌스 올리비에 역시 참 심심했지요. 전 맥시밀리언 드 윈터가 무슨 일을 당하건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뻣뻣하기가 정장차림의 마네킹과 맞먹었으니까요.

진짜 제가 로맨틱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덴버스 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로맨티시즘을 확 깨워놓은 장면은…. 아마 많이들 짐작하셨을 겁니다. <셀룰로이드 클로젯>에서 한번 인용한 뒤로 다들 이 장면 이야기만 하니까요. 소설 속에서는 덴버스 부인과 주인공이 두 번째 만나는 장면입니다. 덴버스 부인이 레베카의 침실에서 죽은 여자 주인의 속옷과 잠옷을 하나하나 꺼내 주인공에 내밀면서 설명하는 장면 말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거의 대사로만 일관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더욱 분명했습니다. 덴버스 부인은 정말로 레베카의 속옷을 쓰다듬고 있었으니까요. 주디스 앤더슨의 매섭고 건조한 용모 때문에 그 이미지의 대조는 더욱 분명했고…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전 ‘죽음을 초월한 사랑’ 운운에는 이미 익숙했습니다. <폭풍의 언덕> 같은 비극적으로 끝나는 로맨스소설을 줄줄 읽다보면 다들 익숙해지지요. 하지만 덴버스 부인은 조금 달랐습니다. 덴버스 부인의 사랑은 지극히 관능적이고 육체적이었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오래 전에 고기 밥이 되어 하얀 뼈만 남았는데도 말이에요. 죽은 주인에 대한 덴버스 부인의 사랑은 다른 비극적 연애소설들처럼 육체를 초월한 정신적인 사랑으로 이어지는 대신 오히려 더 육감적이 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덴버스 부인의 패러독스는 제가 알고 있는 세계의 규칙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어서 굉장히 오랫동안 제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마 제가 온갖 종류의 페티시즘에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최초로 접한 진짜 로맨스의 느낌이 무뚝뚝한 중년 아줌마의 속옷 페티시와 연결돼 있었으니 말입니다.

적어도 제 머릿속에서 페티시스트들은 더 창의적인 연인들입니다. 눈앞에 버티고 있는 육체에 생각없이 흥분하는 ‘정상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육체적 사랑을 무언가 다른 것들로 변형시키는 것이니까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시에서 크게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답니다.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