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아름답다’는 표현을 실생활의 대화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정작 일상생활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기 드물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그 표현을 쓸 일이 적어졌기 때문일까. 대체로 우리가 즐겨쓰는 감탄사들은 “멋지다. 끝내준다. 죽인다. 섹시하다. 장난 아니다” 이런 수준인 듯하다. 돌이켜보니 역시 ‘아름답다’라고 말해야 할 경우를 굳이 저렇게 과격하고 거칠게 표현한 적도 없는 것 같다. 이처럼 평소에 아름답다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으니 아주 간혹 만나는 아름다운 자연풍광 앞에서도 결국은 “끝내준다. 죽인다” 따위의 표현이 더 자연스럽게 쓰이곤 하는 것이다.
진실로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가 박상륭 선생의 표기에 따르면, ‘아름다움’의 원래 표기는 ‘앓음다움’이다. ‘앓음’이란 알다시피 ‘육체적, 정신적 아픔, 혹은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는 상태’이다. 그런고로, ‘아름다운 사람’이란 ‘아픔과 고난을 이겨낸 사람답다’는 뜻이 된다. ‘아름다움’의 어원에 대한 다른 주장도 여럿 있는데 대체로 좀 억지스러운 반면, ‘앎음다움’이란 표기는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진실로 아름다운 것들을 찾는 데에 어떤 실마리를 던져준다.
아름다움이란 과연 고난과 고통을 이겨낸 뒤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존재의 모습이다. 불교에서는 진흙탕에서 피어난 연꽃의 앓음다움을 통해 해탈을 배우고, 헤르만 헤세는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앓음다움이 한 세계를 초월하는 날개를 가질 수 있음을 노래했고, 트리나 폴러스는 애벌레의 앓음다움이 세상의 모든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초록별은 세상의 모든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운 무성한 앓음다움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사람’은 ‘앓음다운 사람’이니, 제 스스로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번뇌하고, 고민하고, 갈등과 유혹을 싸워 이기고 쉼없이 공부한 사람이다. 세파에 톡톡히 시달리고도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 병마에 시달리고도 웃음과 온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진정으로 앓음다운 사람이다. 번뇌와 인내의 고통은 알이고, 고치이고, 씨앗이다. 그 안에서 충분히 앓은 뒤에 한겹의 껍질이 부서지고 비로소 비상하는 날개가 돋고 나눔의 열매가 맺힘은 자연의 이치이다. 새싹처럼 푸른 날개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어찌 우리 다시 아름답다 말하지 않을까.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www.theg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