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1967년
감독 아서 펜
상영시간 111분
화면포맷 1.85:1 아나모픽
음성포맷 DD 1.0 영어
자막 한글, 영어
출시사 워너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인종차별반대운동, 동성애해방운동, 페미니즘, 히피 반문화 등의 사회적 변화에 기반을 둔 이른바 아메리칸 뉴시네마는 기존 할리우드영화를 탈신화하는 기능을 했지만, 이제 그 자체로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작가주의 전통을 이어간 뉴할리우드라는 것은 과거의 급진주의와는 거리를 두게 된다. 어쨌든 옛날 옛적에 미국에서도 새로운 흐름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전환점의 시작을 1967년이라고 한다면, 이 해에 제작된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그 상징적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장르를 갱스터영화라고 볼 수 있겠지만, 1930년대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와 같은 영화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1930년대 갱스터들은 도시의 뒷골목에서 윤리적인 파탄에 이른 자들이라면, 보니와 클라이드는 대낮에 자연의 벌판을 활보하면서 지루하고 따분한 텍사스의 시골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했던 외로운 영혼들이었다. 그들은 선량한 시민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명해졌다.
이 영화는 분명히 1960년대적 가치를 대변한다. 비록 그들은 갱스터였지만, 클라이드 역의 워런 비티는 로버트 케네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보니 역의 페이 더너웨이는 당시 여성잡지의 모델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 영화는 베트남전쟁의 시기에 주류적인 사회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항적 텍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좀도둑과 웨이트레스라는 하층계급에 속했지만, 그 계급적 이미지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60년대의 가치인 자유와 행복, 자존심과 서로에 대한 사랑을 얻고 싶어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이다. 클라이드의 성적 무능력은 결국 영화의 끝에서 회복되고, 곧이어 그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기관총 세례를 받으면서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슬로모션으로 촬영되어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들의 개죽음은 바로 반항의 시기인 60년대가 70년대의 반동에 어떻게 패배하게 되는가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것은 정말 냉혹한 역사의 법칙인 것일까. 류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