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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더 레인보우
심은하 2004-04-22

새 버전의 인텔 펜티엄 프로세서가 개발되면, 지금 쓰는 컴퓨터와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초현실적인, 컬러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의 안무를 보며, 당신은 현실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 장롱 속에는 한때 핸드폰이라 불리던, 그러나 이제 무전기라 여겨지는 모종의 통신장비가 누워 있다. 통화는 가능해도, 들고 다닐 순 없다. 뭐랄까, 초현실적인 인물 취급을 당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안 바꾸셨나요? 당신 참, 독종이군요.

올해의 경향이란 것도 있다. 물론 <올해의 경향> 하고 나오는 게 아니고, 주로 웨이브나 트렌드, 패션, 모드, 코드, 코어, 스타일, 컨설팅, 붐, 줌, 업그레이드, 리뉴얼, 컬렉션, 템프테이션(하, 항복입니다!) 등의 조합으로 여성지의 면면을 장식한다. 새로운 패션을 지난해의 패션에 겹쳐 입을 순 없다. 컴퓨터를 버리듯, 즉 벗고, 새로 걸쳐야 한다. 지난해의 유행이 복고란 이름으로 다시 유행하기까지는, 대략 25년 정도가 소요된다. 살아 있으면, 다행이다.

자동차도 마찬가지, 당신의 생활필수품도, 결국 당신의 삶도 마찬가지다. 바꾸세요, 더 커지고, 빨라졌어요. 더 조용하고, 더 작아졌어요. 더 가볍고, 산뜻해요. 오버 앤 오버. 무지개를 향해, 그렇게 삶은 흘러간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5대의 컴퓨터를 사용했고, 11차례의 업그레이드를 했으며, 4종류의 윈도우를 경험했었다. 처음의 윈도 3.1을 생각하면, 뭐랄까 마지막의 윈도 2000은 마하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버 앤 오버. 바꿨습니까? 바꿨습니다. 만족합니까? 만족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기막힌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컴퓨터가 빨라지면, 오히려 업무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컴퓨터가 좋아지면, 오히려 일이 더 밀리고 밀린다는 사실을.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마하처럼 빨라진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며, 나는 그만 혼돈에 빠져버렸다. 오버 앤 오버- 도무지 알 수 없는, 우리들의 산 너머, 산.

비록 이상한 일이지만, 기기가 좋아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자동차를 개발할수록 체증은 더 늘어만 가고, 새로운 패션의 그늘에선 새로운 열등감이 창출되고, 네트워크를 이룰수록, 서로를 만나는 횟수는 줄어만 간다. 그런 이유로, 신석기(新石器)가 인간의 편리를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니었음을, 사회의 편리를 위해 개발된 것이었음을- 이 <오버>의 강가에서 나는 지레, 짐작해본다. 세계의 발전이 인간의 발전은 아니었다.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이 아니었듯이.

<오버>를 창출한 것은 무지개였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저 자리에 무지개는 걸려 있었고, 우리는 누구도 저 무지개를 넘어가지 못했다. 무지개를 만든 것은 누구였을까? 무지개를 가리킨 것은, 또 누구였을까? 또다시 일이 밀려든다. 오늘 따라 저 무지개는- 컬러방진복을 입고 춤추는, 인텔 펜티엄 프로세서의 광고 화면 같다. 뭐랄까, 놀고 있네. 억울한 구석기인처럼, 나는 중얼거린다. 마음속에서, 여지껏 빚어온 빗살무늬토기가 깨지는 소리 들린다. 박민규/ 무규칙이종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