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6일 서울여성영화제의 한 부분으로 상영된 미조구치 겐지의 <곡예사의 사랑>(1933)은 일본의 여성변사 사와토 미도리의 변화무쌍하고 열정적인 목소리 공연과 아울러 매우 흥미로운 관람 경험을 제공했다. 옛날 영화들을 잘 간수해서 보란 듯이 세계 순회를 하는, 당연하지만 우리에게는 그저 지당하신 말씀에 불과한 일본 영화계의 모습, 거장의 초기 영화를 통해서 그의 프레임과 스타일, 작법이 형성되어 가는 실마리를 엿보는 흥분, 소리를 갖지 못한 미완성의 영화가 아닌 독특하고 복합적인 서사체계로서의 무성영화를 실감하는 기쁨 등이 겹쳐 장내를 가득 메운 관객들 가운데 어떤 이는 소리죽여 울기도 했다.
변사는 무성영화를 상영할 때 현장에서 대사를 읊거나 내용을 설명하고 해설해주던 사람으로, 서구에서는 토키영화의 등장과 함께 자연스레 소멸했다. 그러나 일본, 한국, 대만 등지에서는 오래도록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관객의 영화관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영화배우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며 높은 수입을 올렸다는 등의 단순한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감독들은 변사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고 따라서 변사는‘영화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음성으로 전달되는 전통적인 이야기하기 방식이 영화와 만나 근대적인 변형을 이뤄낸 것이다. 그것을 매개한 변사가 오래도록 영향을 끼쳤던 지역의 경우, 영화나 드라마 등의 대중 서사양식에 변사의 영향이 드리워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또한 옛 양식은 적절한 해석과 영감이 결부될 때 가장 현대적인 양식으로 돌변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변사에 대한 연구와 아울러 변사 양식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도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와토 미도리는 그러한 일본에서조차 희귀한 여성 변사다. 그는 이번 여성영화제가 마련한 ‘아시아특별전: 시대의 증거, 일본 고전영화 속 여성’ 섹션에서 미조구치 겐지의 무성영화 <곡예사의 사랑>을 공연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1973년에 데뷔한 사와토 미도리는 당시 일본 변사공연자의 1인자였던 마쓰다 슈운스이의 공연을 보고 변사가 되길 꿈꾸었다. 그 시점은 물론 변사의 황금기에서 한참 떨어진 후의 일이다. 마쓰다도 그 당시 일본에 현존하는 몇 안 되는 변사들 중 한명이었다. 사와토는 마쓰다가 공연한 <곡예사의 사랑>을 보고 변사가 되길 결심했고, 이후 마쓰다에게 사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스스로 얻어내야 했다. “영화를 이해하는 힘과 설명할 수 있는 표현력은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와토 미도리는 마쓰다 선생에게서 아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 그것이 변사로 훈련받는 방법이었다. 대신 그는 스승의 공연과 다른 변사들의 공연을 무대 뒤에서 ‘훔치듯’ 지켜봤고, 라쿠고(16세기에 시작된 일본의 전통 희극 발성서사 양식. 변사가 희극영화에서 사용하는 대사전달방식과 일상적인 대화에 사용하는 대화체 언어가 여기에서 나왔음)나 옛 변사 공연을 담은 레코드를 반복해서 들었다. “이렇게 해서 나만의 예(藝)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사와토 미도리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은 여성에 대해 굉장히 인색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해온) 이 여주인공의 화려하고 빛나는 존재감만큼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할 정도”라고 분명한 자기 해석을 내놓았다. 노력으로 다져진 30년 경력의 프로페셔널이면서도 일본인 특유의 겸손함과 상냥함을 갖고 있던 그는, 그리고 이틀 뒤에 1년에 100회에 달하는 공연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본으로 돌아갔다. 글 박혜명·사진 정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