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
뉴미디어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제공하는 책인 <뉴미디어의 언어>(레프 마노비치 지음, 서정신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를 시작하면서 저자인 레프 마노비치는 일종의 안내자로서 한편의 영화를,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70여년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영화를 끌어들인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그는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뽑아온 스틸 사진들과 많은 부분 그 영화에서 도출된 생각들을 한데 배열해놓고는 영화의 언어, 영화의 가능성, 영화의 조건 등에 대해 이론적인 일종의 아포리즘이라고 할 만한 것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물론 마노비치는 뉴미디어의 인식론과 언어 등에 대해서도 깊이있는 단상들을 병치해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흥미로운 프롤로그에서부터 우리는 마노비치의 이 책이 뉴미디어를 다루는 데 있어서 과연 기본적으로 어떤 시각을 갖고 전개될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시각이란 건 <디지털 시대의 영화>라는 책에서 토마스 엘새서가 영화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쓴 이런 문장이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닐까. “각각의 매체는 자신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것의 기술적이고 문화적인 ‘고고학’을 지니고 있다.”
뉴미디어에 대한 논의는 종종, 특히 그것에 대해 너무나도 매혹된 사람이 펼치는 것이라면 더욱더, 미래론으로, 즉 그 새롭다는 매체의 미래에 대한 예견들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뉴미디어의 언어>에서 마노비치가 전개하는 뉴미디어론은 뉴미디어를 그것이 걸어온 역사적 과정 안에다가 위치하면서 섣부른 미래론의 위험성을 벗어난다(마노비치는 역사화한 논의야말로 미래에의 예상도 좀더 효과적일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으로써 논의는 더 풍부해지고 깊이를 가지며 흥미진진해진다. 우선 이것은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 있듯이, 뉴미디어의 언어, 즉 그것의 장치들이나 핵심적인 형식들에 관심이 있는 책이다. 마노비치는 그 언어가 인쇄물, 영화,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가 취한 전략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는지를 세밀하게 이야기한다. ‘언어’를 고려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탈역사적인 구조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마노비치는 본격적인 뉴미디어의 탄생을 알아보기 위해서 어떻게 19세기 중반쯤 비슷한 시기에 설계된 영상매체와 계산기가 ‘수렴’하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물론 마노비치의 논의가 흥미로운 건 단지 역사적 궤적을 그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 궤적 안에다가 영화이론, 미술이론, 문학이론, 그리고 컴퓨터과학 등을 끌어들임으로써 그것을 풍성한 역사적 궤적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이건 비단 뉴미디어만이 아니라 미디어 일반에 진지한 관심이 있는 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